2016.06.29
_전혜숙
생명과 관련된 life/non-life, natural/unnatural, human/non-human 등의 개념들은 어떤 시대에든 존재했었고, 각 시대의 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과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각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생명은 St. Augustine 혹은 예언자 무하마드가 생각한 생명이 아니며,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과학자 Watson and Crick이 생각한 생명과도 다르다. 만약 생명이 mobility, self-replication, and awareness의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로봇은 살아있는 것이되 배양된 조직은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생명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혼 혹은 유태교-무슬림-기독교적인 의미대로 the divine에 연관된 것이라면, 로봇도 생명이 아니고 배양된 조직도 생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발표에서는 현대생물학과 생명기술들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생명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생명 개념 자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생명을 다루는 방식이 과연 달라졌는가, 달라졌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생명 기술에 의해 도발된 문제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존재론적인 문제인 “What is life?”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다루는가?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지 않은 것인가? 예를 들어 당신은 로봇을 살해하는가? 아니면 부수는가? 혹은 아니면 꺼버리는가? 생명이 시작되는 정확한 순간은 무엇 혹은 어디인가? 실험실에서 계속 배양하면서 돌보아 온 세포들에 대해 ‘살해’한다는 표현이 맞는가? 만약에 우리가 신체의 일부를 신체 밖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해서 조작하고 수정하며,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 신체에 대한 지각, 전체성, 우리의 자아와 관련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항상 ‘생명’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게 되며, 다시금 브라이도티가 제안한 ‘포스트휴먼 조건의 공통분모’를 생각해보게 된다.
생명기술과 함께 해 온 바이오아트는 다양하고 심오한 태도로 생명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어왔다. 바이오아트는 전통적인 미술이 해 온 신체(인간이든 아니든)에 대한 작업(초상화, 퍼포먼스 등등)을 넘어선다. 바이오아티스트들은 적극적으로 생명을 재정의하는 데 동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들은 생명이란 그들 주변에서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늘 ‘재규정’되어왔다는 사실을 다시 재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 글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 연구단 제106회 콜로키움에서 전혜숙 선생님이 발표하신 논문의 요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