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5
19세기 중반이후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구세력에 의해 전통적 ‘세계’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방어의 성격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질서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으로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1876년 개항이후 조선은 타의적이지만 근대로 접어들었다.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근대 지식인들 일명 개화지식인들은 뒤 늦게 근대로 진입한 것에 대한 초조감이 있었다. 이러한 초조감은 조선을 빠른 시일 내에 근대국가로, 부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개화지식인들은 개항 전까지는 전통 성리학 교육을 받다가 개항 후 일본과 청나라를 통해 근대 서구 문명을 접하면서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고자 했던 유학적 성향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화’ 추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방침으로 조선인들을 개화시켜 서구를, 일본을 본받고 나아가 따라잡고자 하였다.
근대초기의 새로운 지식은 정부 주도의 신문을 비롯한 출판물, 각종 민간 주도로 발행된 신문과 잡지 혹은 학회지와 같은 매체 등을 통해 전파되고 일반인들에게 인지되었다. 특히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발간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식/학문체계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에서 근대적 학문체계로서 서구학문이 도입되면서 통합적 성격이 강했던 전통적 학문은 분화/분리되기 시작하였다. 개화지식인들은 경제학, 상업학, 지리학, 물리학, 광물학, 동식물학 등 분화된 서구학문을 적극 소개하면서 이와같은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취사하면 조선을 새로운 세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와같은 현상을 ‘개화’라 통칭 하였다. 개화지식인들은 ‘개화’ 즉 새로운 지식의 수용과 습득이 시대의 현안을 해결하는 대안이라 강조하였던 것이다.
조선 또한 시간적으로는 전통과 근대, 문화와 공간적으로는 서양과의 만남이 시기였지만 근대와 서양은 전혀 낯선, 새로운 것이었다.기존의 전통적 틀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변화하는 작업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즉 서양의 근대와의 접촉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근대로, 근대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지난한 노력을 요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양과의 접촉은 인적, 물적, 지적 정보의 문화적 교류를 동반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교류는 서양을 타자로 삼아 조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을 이행하기에 시간은 너무나 촉박했다. 이 촉박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화지식인들은 빠른 시일내에 근대지식을 수용해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화’를 강조하며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통해 홍보하고, 계몽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한성순보에는 개화지식인들 추구하고자 했던 ‘개화’와 그 방법 등이 비록 외국 신문 기사 내용을 번역하여 실은 것이지만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이에 한성순보를 통해 당시 개화지식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개화’가 어떤 의미였는가, 그리고 개화의 방식으로 구상했던 것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역관의 변화 과정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의 초기 근대의 지식의 수용과정과 그 지형도의 일 단면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위 글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 연구단 제67회 콜로키움에서 김수자 선생님이 발표하신 논문에 대한 서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