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3
중국과 유럽의 사상적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진영은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이들을 매개로 한 중국 지식의 확산은 유럽에서 중국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와 동시에 비유럽 사유체계를 통해 유럽 자신의 사유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볼테르(1694~1778)는 중국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국애호가’이다. 현실 참여 지식인 볼테르가 평생 동안 관심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주제는 종교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의 문제였다. 그의 중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도 종교 문제 혹은 종교적 관용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독교를 이성의 진보에 대한 장애물로 파악한 볼테르는 종교도 이성의 빛 아래 조명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적 계시나 기적을 부인하였다. 그런데 그는 유교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종교를 보았다. 예수회 선교사로서 마테오 리치의 후임자인 롱고바르디가 리치의 적응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시작한 중국전례논쟁은 유럽으로 번져 유럽 내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례논쟁은 마침내 교황청과 중국 황실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된다. 볼테르는 중국과 유럽에서 전개된 전례논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볼테르는 적응주의 입장을 취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하였으며, 중국인들이 무신론자이며 우상숭배자라고 판단한 데 대해 비판하였다. 볼테르는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를 추방한 진정한 원인이 선교사들과 선교회들 상호간의 분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볼테르는 중국 전례문제를 다루면서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는 동시에, 자기비판적이며 자기반성적인 관점을 유지한 점에서 매우 큰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볼테르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타자’인 중국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함인가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 그가 중국을 다룬 것은 공자와 유교를 활용하여 결국은 기독교와 현행의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는 공자나 유교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었으나, 도교나 불교 같은 중국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테르는 중국 이해에서 매우 공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위 글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 연구단 제72회 콜로키움에서 송태현 선생님이 발표하신 논문에 대한 서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