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2
_정선경
한국의 근대 번역문학에 대한 선구적 연구에서 ‘역사류’와 ‘전기류’는 총 작품수의 절반을 상회한다. 번역서들은 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거나 시대적 각성을 촉구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주제는 외국의 역사물이었고, 서구 영웅 서사의 번역은 근대번역문학사상 특수한 문화적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 외세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흔들리는 시점에서 지식인들은 역경을 딛고 승리를 쟁취한 역사적 영웅을 호출하고 번역의 대상으로 삼았다. 서구에서 출발한 영웅 서사는 일본과 중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조선에 도착하면서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재구성되었다. 한중일 삼국은 ‘서쪽’으로부터의 근대 지식을 수입했고 그것을 자국화하는 방식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맥락화되었다.
이 시기 양계초는 서구문명과 지식을 적극 수용하여 만신창이가 된 중국사회를 개조하고자 했다. 정치가, 사상가, 계몽선전가였던 그는 서구의 근대적 사학개념을 받아들여 史界혁명을 주도했고, 소설계혁명, 시계혁명, 문계혁명, 희극개량운동 등 문사철의 각 분야에서 5.4 신문화운동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서구 근대 지식을 서둘러 자국민에게 소개하면서 愚民을 계몽시키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1900년대 조선에서도 상당한 주목과 지지를 받았다. 그의 정치사회적 행보는 조선의 지식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역사학, 철학 뿐 아니라 문학계에도 ‘知’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일본을 경유한 양계초의 한역 재역서들은 1900년대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어 바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양계초 작품의 국내 번역서와 출판물이 유행했고 이 시기 영웅 전기의 번역 및 창작을 언급할 때 그를 제외하고 논의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본고에서는 梁啓超의 『意大利建國三傑傳』수용을 중심으로 영웅 서사의 번역을 통해 한중 양국에서 자국화된 구국 의식이 각각 어떻게 발양되었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근대 계몽기 대표적인 역사전기물인 『意大利建國三傑傳』은 카밀로 카부르, 주제페 마찌니, 주제페 가리발디라는 세 영웅의 행적을 중심으로 이태리 통일의 역사를 이야기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양계초를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다. 『意大利建國三傑傳』은 신채호, 주시경과 이현석에 의해 번역되어 각각 1907년, 1908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주목할 점은 1902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양계초의 『意大利建國三傑傳』은 1892년 일본의 히라타 히사시(平田久)의 『伊太利建國三傑』을 역술한 것이며, 또한 히라타 히사시는 1889년 영국의 메리어트(J.A.R.Marriott)가 쓴 The Makers of Modern Italy를 번역한 것이다. 즉, 이태리 통일사에 관한 영국인의 저술은 일본과 중국 지식인의 손을 거쳐 조선에 번역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서구의 문명과 근대 지식이 일본으로 이식되고 다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연계되는 과정에서 번역은 근대 동아시아를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특히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일본과 달리, 제국의 폭력에 저항하는 조선과 중국에서는 어떻게 영웅 서사를 수용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해 냈는지 한중 지식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이태리를 통일시킨 영웅의 이야기가 양국에서 어떻게 번역되어 소비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실천적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조망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번역문 이면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번역본 이외 각 지식인들의 입장이 잘 표명된 논설문을 참조하여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고자 한다.
위 글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 연구단 제89회 콜로키움에서 정선경 선생님이 발표하신 논문의 요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