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근대여성교육의 장을 연 이화여자대학교는 1945년 행림원(杏林院) 의학부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정규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이어 의약대학 시기(1951-1954)를 거쳐 1954년 의과대학이 설립되었고, 2007년에는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되었다.

지금은 2017년 의과대학체제로의 재전환과 2018년 마곡캠퍼스 이전 및 새병원 건립이라는 중대한 전환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의과대학의 태동에서부터 현재를 되짚어보는 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되새기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설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한국 근대여성사에 길이 남을 정규의학과정의 개설은 1945년 행림원 의학부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올해 70주년을 맞았으나, 이화 의학교육과 진료의 역사는 이화학당이 설립되던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행림원 설립 이전의 역사를 살펴보고, 의과대학 70년의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 행림원 설립 이전 (1886-1944)


가. 보구여관(保救女館) 시기 (1886-1892)


1)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하다.


1886년 5월 31일은 미국 감리교 여자외국선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 여사가 이화학당을 창립한 날로, 우리나라 근대여성교육의 원년으로 기록된다. 스크랜튼 여사는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관습 때문에 당시 모든 병원이 남자에 의해 운영되던 시절 여성들이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이 땅에 여성병원의 설립이 시급함을 미국에 알리게 된다.

스크랜튼 여사는 1887년 10월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기금을 지원받아 서울 정동에 여의사가 진료하는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을 개설하였고, 1888년 11월에는 이화학당 구내에 독립된 병원건물을 마련한다. 고종황제는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이는 오늘날 이화의료원이 된 동대문병원의 전신이자 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2) 이화, 여성의학교육의 선두에 서다.


1890년 10월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wood, 후에 Mrs. Rosetta Hall)가 부임하였다. 셔우드 박사는 진료뿐 아니라 여성 의학교육에도 강한 열의를 보여,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 생리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중 5명을 선발하여 의료보조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조직하고 약물학, 생리학 등의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는 의사와 환자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을 받고자 시작된 것이었으나, 이 훈련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과학기술 훈련이었다.


3) 보구여관, 의료, 교육, 전도의 장으로 자리잡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 구내에 위치하고 또한 스크랜튼 여사의 관할 하에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이화의 자매기관 내지는 학당부속기관 같은 관계에 있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의 건강문제는 보구여관에서 담당하였고, 보구여관의 의사들이 학당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보구여관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이화학당에 입학학 경우도 있었고, 학당의 학생들은 통역부터 약제실 일에 이르기까지 보구여관의 여러 일에 도움을 주었다. 즉, 보구병원은 이화학당의 학생들에게 근대과학기술을 접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나아가 여성들에게 전문직업의 한 분야를 열어 주었다.


 

 

나. 동대문부인병원 시기 (1892-1945)


1) 보구여관을 모태로 동대문 부인병원이 설립되다.


1892년 보구여관은 동대문에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Baldwin) 진료소’라고 명명하였다. 초대의사로 릴리안 해리스(Dr. Lillian Harris) 박사가 부임하여 1909년 당시 한국 최대규모인 건평 360평(1190.10 m2) 규모의 병원(동대문 부속병원의 구관)을 착공하여 1912년 준공하였다. 그의 공로를 기념하여 병원명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으로 개칭하고 정동 보구여관과 통합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서 이 병원은 산부인과를 전담하는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1936년부터는 미국 선교본부의 보조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이 가능해졌으나, 이화재단 설립에 분망하던 1942년 재단기금 설치를 위하여 강씨, 황씨에게로 매도된다.


2) 국내 최초의 여의사를 배출하다.


1892년 5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던 여성의학교육은, 이들 중 1명인 박 에스더(본명 김점동) 여사가 홀 박사(Dr. Hall)의 주선으로 미국 볼티모어(Baltimore) 여자의과대학에서 정규 학위를 받음으로서 역사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1900년 귀국한 박 에스더 여사는, 보구여관과 평양부인병원 및 각지의 진료소에서 수술과 응급진료를 담당하였다.


3) 국내 최초로 간호사 교육을 시작하다.


1903년 3월 보구여관 의사들의 오랜 숙원이자, 한국 여성사의 또 하나의 효시가 된 간호사 교육이 시작되었다. 미시간(Michigan) 대학 간호원 양성학교를 졸업하고 9년 실무경험을 지닌 마가렛 에드먼스 소장(Miss Margaret J. Edmunds)은 보구여관 내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초기의 간호사교육은 한국인들의 시간개념, 위생개념을 극복하고 명령에 대한 복종과 인내력을 훈련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6명으로 시작된 교육은 1년여 만에 2명이 탈락하고 4명만이 최종적으로 과정을 마쳤다. 당시 우리말에는 없던 ‘간호원’이라는 용어는 에드먼스 소장이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자에서 뜻을 빌어 우리말로 정착시켰다.


4) 의과대학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교육은 특히 1917년 홀 박사에 의해 시작한 여성의학연구소(Woman's Medical Institute)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정규 의학과는 개설되지 않았으나 1931년부터 주당 4~6시간씩 강의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동경여자의과대학에 유학생 파견이 주선되었고, 정부시행 의사자격고시에서도 첫 합격생이 나왔다. 보구여관과 간호원양성소는 그 시작과 형성기에 있어서 이화학당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서로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 근대여성사의 중요한 한 시대를 형성해 왔다. 특히 이화가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길러 내고 해방과 함께 의과대학을 설치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바로 보구여관이었다.



2. 행림원 및 의약대학 시기 (1945-1954)


가. 행림원 시기 (1945-1951)


1) 행림원이 설치되다.


1945년 4월 경성여자전문학교(이화여자대학교의 일제치하의 명칭)는 후생과(초대과장 최재유 박사)를 두고 소수의 학생을 모집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 해방을 맞으면서 경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로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으며 동년 10월에는 의학과(과장 손창환 박사)를 두게 된다.

1946년 8월 15일에는 문교부로부터 한국 최초의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하였다. 학제는 한림원(문과, 가사과, 체육과 및 아동교육학과), 예림원(음악과, 미술과), 행림원(의학과, 약학과)의 3개 원, 8개 학과로 구성되었고, 김활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에는 의학과를 의학부로 승격시키고 그 산하에 4년 과정의 본과와 2년 과정의 예과를 두었다.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개방한다는 김활란 총장의 교육방침에 따라 당시의 본교 입학은 비교적 수월하였으나, 의학과는 예외적이었다. 1945년 10월 행림원 의학부는 93명의 첫 입학생을 받아들였고, 1951년 6.25 전쟁의 와중에도 27명의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 행림원 의학부에서 정규의학교육이 시작되다.


행림원 의학부의 교수진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연구하던 젊은 의사들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근무하는 한국인 교직자들, 그리고 광복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의사들이었다. 이들의 학문 수준은 높았으나 수적으로는 매우 부족하여 교수 1인이 보통 2~3개 대학의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본교도 예외 없이 시간강사가 전임교수보다 많아 약 80%를 차지하였다.

1948년도 의예과와 의학과 과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예과 과목은 국어, 문화사, 체육, 성경, 영어, 수학, 화학, 화학실습, 일반동물학이고 선택과목으로는 일반물리학, 일반물리학실습, 일반심리학, 생물학, 생물학실습, 태생학, 의학사를 두었다. 의예과의 취득학점은 4년제 고등출신은 101학점, 6년제 고등출신은 95학점으로 정하였고, 의학과 취득학점은 총 209학점으로 구성되었다. 의학과 1, 2학년 교과목은 성경, 영어, 해부학, 해부학실습, 조직학, 조직학실습, 태생학, 생화학, 생화학실습, 생리학, 생리학실습, 세균학, 세균학실습, 병리학, 병리학실습, 약리학, 약리학실습으로 구성되었는데, 실습실이 부족하여 해부실습은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 부속병원에서, 조직학 실습은 서울의대 조직학 실습실에서 진행하였다. 임상과목은 내과진단학, 외과총론, 예방의학, 예방의학실습 및 임상, 심리학, 외과학, 외과학임상실습, 소아과학, 소아과학임상실습, 산부인과학, 산부인과학임상실습, 정신신경병학, 법의학, 피부병학, 안과학, 안과학실습, 이비인후과,이비인후과임상실습 등으로 구성되었고, 임상실습은 용산의 철도병원을 이용하였다.


3) 대학원 의학과가 신설되다.


1950년 6월 이화여자대학교에 대학원 의학과가 신설되었다. 이로써 의과대학은 의사 양성은 물론 전문연구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나, 곧 이은 6.25 동란의 발발로 인해 대학원은 1951년 부산의 피난학교에서 본격적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53년 6월 당시의 직제를 보면 대학원장(김활란 총장), 부원장, 학무과장 외에 교수 15명, 부교수 5명, 조교수 2명, 강사 20명으로 총 42명의 교수진을 두었다. 총 학생수는 44명이었는데, 이중 의학과가 10명으로 가장 많았다.


4) 동대문 부인병원을 부속병원으로 지정하다.


1945년 의과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실습병원이 필요해진 이화여자대학교(김활란 총장)는, 동대문 부인병원을 다시 매수하여 의학과 부속병원으로 지정한다. 그러나 초기 동대문 부속병원은 진료과목이 적고 장소가 협소하여 의과대학생들의 실습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에는 총 연건평 1,562.5평(5,165.29 m2)의 현대식 시설을 갖춘 신촌 병동의 신축이 진행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나. 의약대학 시기 (1951-1954)


1) 행림원을 의약대학으로 개칭하다.


1951년 3월 문교부의 요청으로 ‘원’을 대학’으로 개칭한다. 한림원을 문리대학으로, 예림원은 예술대학으로, 행림원은 의약대학으로 개칭하고 법학대학과 사범대학을 신설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는 5개 대학, 18개 학과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이 된다. 당시의 의약대학은 의학과, 간호학과 및 약학과로 편제되었으나, 1953년 8월 5개 대학, 13개 (학)부 및 29개 학과로 기구를 개편하면서 의학과, 간호학과 및 약학과를 두었던 의약대학도 의학부, 약학부, 및 간호교육학부로 편제를 개편하였다.


2) 부산 피난지 가교사에서 첫 의대졸업생을 배출하다.


1951년 8월 20일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은 부산 피난지 가교사에서 첫 졸업생 24명을 배출하였다. 졸업식도 없이 각 개인에게 졸업장이 전달되었으며, 대구 전시연합대학인 경북의대에서 졸업한 3명을 합쳐 1회 졸업생 27명을 탄생시켰다. 당시 의약대학의 의학부 본과생들은 부산, 대구의 전시연합대학에서 수강 중이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8월 김활란 총장은 부산시 대청동의 2층 목조건물에 임상 7개과(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임상병리과)를 갖춘 “Ewha Healing Center"를 설치하고 환자치료와 학생실습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3. 의과대학 시기 (1954-2006)


가. 의과대학 초기 (1954-1971)


1) 의약대학 의학부가 의과대학으로 승격되다.


1954년 4월 의약대학이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으로 분리, 인가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의 단과대학은 6개로 늘어난다. 초대 의과대학장에는 이세규 박사가 취임하였다. 1955년에는 국내 최초로 의과대학 내에 간호학과가 신설되었고 이는 1968년 간호대학으로 독립하였다. 1970년 4월에는 본교 직제가 개편되면서 의무부총장제가 신설되었고, 초대 의무부총장에는 문병기 교수가 취임하였다. 같은 해 이화학당은 이화의료원 신축을 위한 부지로 한남동에 38,618평(127,663.28 m2)의 대지를 매입하였다.


2) 의과대학, 신촌캠퍼스 신축 과학관에 자리하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된 총건평 1246.95평(4,122.15 m2)의 석조건물인 과학관(Appenzeller Hall)은 1948년 10월 착공되어 1955년 완공되었다. 아펜셀라 교장의 업적을 기념하여 아펜셀라 홀로 명명된 이 건물은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에서 사용하였다. 과학관 내 의대공간은 좌석 36석의 도서실, 해부학실습실, 생리약리실습실, 생화학실습실, 조직학 및 미생물학실습실, 병리학 및 기생충학실습실, 실험준비실, 전자현미경실과 중앙실험실, 그리고 교수연구실 등으로 구성되었고, 일부 실습실과 중형강의실, 일반강의실, 도서실, 교수연구실 등은 학생관(1955년 준공)에 위치하였다.

3) 동대문병원 분원으로 신촌병원(1954-1961)이 개원하다.


1954년 4월 의약대학의 실습 및 신촌 주민보건에 이바지하고자 본교 앞 대현동에 건평 142평(469.42 m2), 연건평 285평(942.15 m2)의 2층 콘크리트건물인 신촌병원을 개원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명명하였다. 신촌병원은 18개 입원실을 둔 근대 종합병원으로 1일 환자 100명을 진료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나, 운영합리화를 위해 같은 해 10월 동대문병원과 통합하였다. 이후 신촌병원은 동대문 부속병원의 분원으로서 주로 학생실습과 결핵환자 진료 및 지역사회병원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1958년 5월 건평 157평(519.00 m2)의 연와 단층 별관(환자수용 41명, 입원실 10실)을 신축하고, 사회관과 유아보건상담소를 개설, 운영하였으나, 점차 운영난을 겪게 되면서 1961년 8월 동대문병원으로 편입되어 폐쇄되었다.


4) 동대문 병원,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거듭나다.


재단은 1945년 동대문 부속병원을 매수하였으나, 소유권 분쟁으로 인하여 대법원의 승소판결을 받은 1957년 5월 이후 소유권 이전이 이루어졌다. 1955년 4월에는 동대문 부속병원 직속의 2년 과정 간호학교인 고등간호기술학교를 신설하였고, 1958년 11월에는 현대적 설비를 갖춘 730평(2413.22 m2)의 5층 병동을 신축하였다.

1961년 신촌병원이 폐쇄되면서 동대문병원의 기능은 한층 강화되었다. 공간 확충을 위해 동구여자상업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건물과 대지를 인수하여 총 공사비 35,274,500환을 들여 총건평 245평(809.92 m2)의 외래진찰소를 개관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부속병원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서은숙 박사(당시 재단 상무이사)가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동대문병원은 점차 진료과목을 늘리고 교수요원을 확보하여, 1963년에는 내과, 외과, 정형외과, 흉곽과, 산부인과, 소아과, 안과, 마취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임상병리과, 조직병리과 등 14개과를 갖춘 종합병원이 되었다.


5) 재직동창 82명, 강제 권고로 학교를 떠나다.


1961년 12월 의과대학에 재직하던 졸업생 82명(본교 의과대학 1회부터 9회 졸업생으로, 전공의 1년차부터 조교수, 부교수까지의 전원)은 강제 권고사태로 본교를 떠나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교수월급만으로는 생활이 궁핍하여, 대학 재직교수들의 야간개업이 묵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교 측에서는 야간개업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교수직을 사퇴할 것을 종용하였고, 이에 교수들이 사퇴의사를 표명하게 된 것이다. 졸업생들이, 교수들이 사퇴할 경우 병원의 환자진료와 학생들의 학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의견과 함께 학교 측에 재고를 요청하는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6) 졸업생의 상당수가 해외로 진출하다.


1948년부터 무의촌진료봉사가 시작되었고, 1959년부터는 여름에는 경기도 양평군으로, 겨울에는 강원도 홍천군으로 1년에 두 차례 진료봉사를 떠났다. 1963년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하던 때에는 본과 3-4학년생 총 123명이 콜레라 방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1968년부터는 학생연구지인 ‘이화의학지’를 발행하였다.

1963년부터 1973년도까지 계속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 내 의사수가 부족하게 되자 미국은 타국으로부터 의사를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60년대 초부터 70년대 초까지 의대 졸업생간에 미국의사국가고시 응시가 유행이 되었고, 우리 졸업생은 전원이 응시하여 거의 대부분이 합격하였다. 당시 열악했던 국내의 수련 환경보다는 학문적, 기술적으로 앞서 있는 미국 병원을 찾아 약 3분의 2의 졸업생이 유학길에 올랐다.


7) 이화여자대학교 첫 박사로 의학박사를 배출하다.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는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 2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의학과 출신이었다. 1963년 반헌경 선생은“인삼과 nicotine이 가토의 지질대사에 미치는 영향”, 김혜창 선생은 “Ethanol 및 methanol을 연속 투여한 가토 안구 각 조직의 핵산 GOT 및 비타민 B12 함량 변동에 대하며”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들은 이화여자대학교 전체에서 첫 박사학위수여자여서 그 의미를 더한다.

 

 


나. 의과대학 도약기 (1971-1993)


1) 의료원 체제를 갖추고, 명실공한 대학병원으로 거듭나다.


1971년 8월 의과대학, 간호대학 및 부속병원으로 구성된 의료원이 발족되었고, 이에 따라 동대문 부속병원은 의료원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10월부터 의료원은 건축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새로운 병원시설을 확충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1973년 3월 초대의료원장은 문병기 의무부총장이 겸임하였고, 1976년 9월 제2대 의료원장은 김옥길 총장, 제3대 의료원장은 정의숙 총장(1979), 제4대 의료원장은 윤후정 총장(1990)이 겸임하였다. 의료원 건축 5개년 계획에 따라 1972년 7월에는 간호사기숙사(별관)가 완공되었고, 1973년 9월에는 중앙진료부 건물이, 1981년 8월에는 신병동이 각각 준공되어, 총 연건평 7,240.4평(23,935.21 m2)에 450병상의 입원실을 갖춘 대학병원을 갖추게 되었다.


2)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교육과정과 수련과정을 갖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과대학은 의예과 및 의학과 교육과정, 그리고 동대문병원의 수련의 및 전공의 수련과정도 정비하는 기회를 가진다. 의과대학은 의학교육 전문가를 양성하고, 정기 및 비정기적인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국제기준에 맞춘 교육과정과 학점, 임상수련시간 등을 충족하게 되었다.

연구여건이 열악하던 1970년대 후반에도 의과대학의 김동준 교수와 김구자 교수가 환경문제연구소 연이어 회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1978년에는 교수연구지인 이화의대지가 창간되었다.

의과대학의 입학정원은 학년당 60명이었으나 1981년 국가정책으로 졸업정원제가 도입되면서 입학정원은 104명, 졸업정원 80명으로 증원되었다. 2년 만에 이 제도가 폐지된 이후로도 입학정원은 80명으로 유지되었다.


3) 이화의료원, 목동 병원 개원을 준비하다.


1971년 이화의료원이 발족되면서 추진되었던 한남동 메디칼센터의 건립은 동대문 부속병원 중앙진료부 신축으로 인해 유보되었다. 그러나 제2부속병원 건립의 필요성과 의지는 꾸준히 이어져 왔고, 1983년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1986년 12월 양천구 목동에 8,629.6평(28,527.7 m2)의 병원신축부지를 6,347,162,310원에 매입하였고, 1988년 3월부터는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여 신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93년 10월 목동병원이 개원하였고, 이화의료원은 양병원 체제를 갖춘 명실공한 대학병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4) 이화의대, 네팔진료로 국제봉사의 길을 열다.


1989년 당시 의과대학장이던 해부학교실 김순회 교수를 단장으로 정형외과 최기홍 교수, 정신과 이근후 교수, 전공의 2명, 의과대학생 6명으로 구성된 네팔-이화 메디칼 캠프가 시작되었다. 1990년부터 돌카 병원에서 진행된 네팔진료는 현재 이화의대가 국제의료봉사의 선두주자가 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다. 목동캠퍼스 시기 I: 의과대학 체제 (1993-2007)


1) 의과대학 독립 캠퍼스 시대가 열리다.


목동캠퍼스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의과대학과 기초의학교실은 신촌캠퍼스에, 임상의학교실은 의료원 부속병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 8월 목동에 새로 건립된 지하 1층, 지상 6층, 총 2,927.5평(9,677.8 m2) 규모 의학연구동으로 의과대학이 이전하면서 종합 의과대학 캠퍼스로 거듭나게 되었다. 의대 도서관을 개관하고 CD-Net을 설치하였으며, 1994년에는 국고보조금(1억원)으로 각종 실험기기를 확충하고 컴퓨터실을 설치하였다. 2001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지상 6~9층 730.0평(2,413.3 m2)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목동 의과대학 공간은 총 3,657.5평(12,091.1 m2)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96년(배영숙 의과대학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실시한 학과 평가에서 학부는 “최우수”, 대학원 “우수”로 평가되어 종합 3위에 올랐다. 또한 1996년 “의과대학 발전후원의 밤” 행사 이후로 교수해외연수기금, 의과학연구소운영기금, 대학원장학기금 등 다양한 기금이 마련되어, 교수 및 졸업생, 대학원생들의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고 지원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 2004년에는 오랜 숙원이던 기초의학전공의 제도를 신설하였고, 2006년에는 국제수준의 고급인력양성을 위한 국가지원사업인 BK21 사업을 수주하였다.


2) 연구 수월성 확보를 위한 의과학연구소가 설립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수연구인력 양성과 학술정보 교류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의과대학 내 기구의 건립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마침내 창립 50주년을 맞는 1995년 9월 의학연구동에 의과학연구소(초대소장 정장현 교수)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의과학연구소는 행정실, 중앙기기실(331.24 m2), 전자현미경실(71.74 m2), 동물실(176.20 m2) 등을 갖추고, 국고보조금 및 특별예산으로 유세포분석기(flow cytometer) 등 50여종의 최신 연구기자재를 확충하였다. 의과학연구소는 교수들의 연구 활동을 다방면에서 지원하고, 학술심포지움과 세미나를 개최하며 소식지를 발간하는 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2000년 9월에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연구인력 및 기반 확충을 목적으로 동대문병원 별관에 540평(1785.12 m2) 규모의 이화신경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미국 코넬(Cornell) 대학의 조동협 교수가 석좌교수로, 변광호 교수가 초대소장으로 부임하였다.


3) 대학원 지원을 늘리고 의학과의 문호를 비의학계열에도 개방하다.


1997년 2학기부터는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우수연구장학금과 논문집필장학금 등을 지급하기 시작하였고, 1998년에는 국내 최초로 석·박사학위 통합과정을 개설하였다. 1999년에는 학칙을 개정하여 자연계열 전공생에게도 의학과의 문호를 개방하여 비의학계열 졸업생이 대학원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하고 자연과학과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4) 이화정신을 실현하는 국제봉사의 영역을 넓히다.


1990년 돌카 병원에서 시작된 네팔 의료봉사는, 1995년부터는 덩쿠타, 바그룽, 포카라, 치트완, 까까니, 주파니 등 네팔의 여러 오지로 그 영역을 넓혀, 네팔에 이화라는 이름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2000년부터는 학교 차원의 지원을 받는 공식적인 해외봉사활동으로 전환되었으며, 2003년 캄보디아, 2004년 베트남 하노이로 봉사지역을 확대하게 되었다.


5) 의학전문대학원 체제 전환을 결정하다.


사회적 요구와 국가정책 급변에 발맞추어 2002년 4월 22일 이화여자대학교(장상 총장)는 의과대학(이희래 의과대학장)을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기로 결단하고, 전환시기는 2007년, 정원은 76명으로 결정하였다. 이후 의무부총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본교 교무위원과 의과대학의 학장과 교학부장, 그리고 평교수로 구성된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제, 입시전형, 교육과정, 행정, 시설, 공간 및 기자재와 예산, 교수 충원 및 인력개발, 홍보 등 전반적인 사항을 준비하게 된다.

6) 의학전문대학원 체제 전환을 위한 단계적인 준비가 진행되다.


2003년 7월 의학관 B동 건축계획이 승인되었다(신인령 총장 및 정화순 의과대학장). 2005년 8월 16일 봉헌식을 가진 의학관 B동은 연면적 4,336평(14,333.88 m2),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로, 1~4층은 의료원 공간, 5~10층은 의학전문대학원 전용공간으로 꾸며졌으며, 5층에는 의과학연구소가 자리하였다. 6층에는 실습실, 학생회실, 동아리실 등 학생들을 위한 교육 및 편의공간이 마련되었고, 7~10층에는 최첨단 시청각시설을 갖추 강의실과 소그룹토의실 등의 교육공간과 매점, 복사실, 자율학습실 등 학생복지 및 편의공간이 위치하였다.

2005년 2월(한운섭 의과대학장)에는 행정체계를 개편하여 교무부, 임상교무부, 학생부, 기획부, 연구부 및의학교육실을 두는 5부 1실 제도로 임시 개편하였다. 2005년부터는 의예과 학생을 선발하지 않았고, 동년 9월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선발을 위한 입시제도를 확정하였다. 2005년 7억여원을 지원받는 등 3년간 총 13여억원의 국고를 지원받아 의학전문대학원 체제 정착을 위한 교육과정 개발 및 실험실습기자재 확충에 활용하였다.


7) 동대문 병원을 매각하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성곽 복원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병원 매각설이 돌면서 동대문 병원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 2008년 9월 30일 동대문병원(심봉석 동대문병원장)은 건물, 토지, 지장물을 합하여 총 110,875,411,000원에 서울시에 매각을 최종 결정하고 폐업 신고를 하게 된다.



4. 의학전문대학원 시기 (2007-현재): 목동캠퍼스 시기 II


가. 의학전문대학원 1기 (2007-2010)


1)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새로이 출발하다.


2007년(윤견일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이순남 의학전문대학원장) 의학전문대학원 체제가 출범하면서, 새로이 교육목표와 행정직제를 정비하였다. 행정직제로는 7개 부(교무부, 학생부, 연구부, 임상교무부, 기획부, 입학관리부, 및 의학교육부)를 두고 3부원장(교무, 연구, 및 학생부원장) 4부장 체제를 갖추어 업무전문성을 확보하였으며, 2008년 본부 승인을 받는다.

의학전문대학원 공간은 의학관 A동과 B동을 합하여 총면적 18,204.96 m2으로, 지상 7층, 지하 1층 규모의 A동이 12,036.36 m2, 5~10층까지의 지상 6개층 B동이 6168.59 m2에 이른다.

2) 의학전문대학원 평가에서 6년 인증을 받다.


2007학년도 의학전문대학원 입시를 통해 의학석사(M.D.) 과정 76명을 선발하였으며, 지원경쟁률은 4.8:1이었다. 의학석사-의학박사(M.D.-Ph.D.) 복합학위과정 정원은 2명(76명에 포함)이나 첫해에는 1명만 선발하였다. 복합학위과정은 의과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으로, 별도의 운영위원회를 두어 규정, 성적기준, 학생관리 등 제반업무를 담당하였다.

2007년부터는 졸업 50년과 30년이 되는 동창들을 학교로 초대하여 동창들의 결속을 다지고 장학금 기부 등을 통해 선후배를 이어주는 ‘모교 방문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임상실습 전 의사학생으로서의 각오를 다지는 white coat ceremony도 같은 해부터 개최하고 있다. 대외협력위원회를 통해 보다 체계적인 목적기금 조성계획을 수립하고, 의과대학 발전기금, 의대기숙사 신축기금, 의전원 글로벌인재 육성기금, 국제교류장학금 등으로 기금의 형태를 세분화하였으며, 교실별 발전기금도 조성되었다.

2009년(박혜영 의학전문대학원장) 의학전문대학원 전환 후 받은 첫 인증평가에서 필수 및 권장기준 모두를 충족하며 6년 인증을 획득하였다.


3) 연구활성화 및 중개연구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다.


의학전문대학원은 2006년 전문학위과정 3억 8천만원, 학술학위과정으로 2억 4600만원 등 총 6억여원을 지원받는 등 3년간 BK21 사업의 지원을 받아 연구인프라 구축 등에 활용하였다. 2009년부터 의과학연구소는 의전원 연구자간의 협동연구를 장려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심포지움 및 기초-임상 조인트미팅 등을 기획하였다.


4) 임상실습 및 대학원의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교류를 확대하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의대(Tashkent Medical Academy)와의 국제교류협정(MOU) 체결(2006. 6, 한운섭 의과대학장)을 필두로 2007년(이순남 의학전문대학원장)에는 일본의 오사카의대(2007.1)와 동경여의대(2007.3)와 국제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2008년 8월(박혜영 의학전문대학원장)에는 베트남의 하노이의대와 협정을 체결하고 학생교류를 시작하였고, 2009년 홍콩대학과도 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학원도 제3세계를 비롯한 외국학생들을 유치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국제교류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의학과에도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5) 국제의료봉사의 지평을 넓히고 이화정신인 선교의 꿈을 실현하다.


연 1회 나가던 EMC 국제의료봉사도 2007년부터는 연 2회로 확대하여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봉사하였고, 2013년부터는 베트남, 캄보디아에 우즈베키스탄까지 3개국으로 나가고 있다. 이화해외의료봉사단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제7회 한미참의료인상을 수상하였다.

 

 


나. 의학전문대학원 2기 (2010-2014)


1) 의과대학으로 재전환을 결정하다.


교과부에서는 2010년 5월 의사양성학제와 관련된 최종정책을 발표하고 각 대학에 자율권을 주게 된다. 본교도 동년(박혜영 의학전문대학원장) 7월 의학전문대학원 전체교수투표를 시행한 바 90.3%의 교수가 의과대학 복귀를 찬성하였다. 그 결과에 기반하여 본교 교무회의 등의 절차를 거쳐 2017년부터 의과대학 체제로 전환을 확정하게 되었다. 동시에 진행한 학사편입 비율에 대한 의견조사에서는 정원의 10%를 선발하는 안에 찬성하는 인원이 45명으로 가장 많았고, 20%, 30%, 5%의 순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는 학생들의 직접투표를 통해 선발하는 이화행림교육자상을 신설하였고 첫 해에는 미생물학 우소연 교수와, 내과학의 장중현, 심기남 교수가 수상하였다. 기초전공의제도는 잘 뿌리를 내려 2012년에는 그 지원을 받은 생화학 전공의 박주원, 생리학 전공의 박성희가 전임교수로 임용되는 등 결실을 맺었다. 2012년 7월 의학관 A동과 B동에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역사자료 전시관을 설치하였다.


2) 명실공한 국제대학으로 거듭나다.


2010년 이후 국제교류는 유라시아와 중동으로 그 지평을 넓힌다. 2010년(박혜영 의학전문대학원장)에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의대(Graz), 2012년에는 네팔의 KIST 의대와 아랍에미리트의대와 국제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2013년에는 아제르바이젠(정성민 의학전문대학원장)의 대학관계자들이 방문하여 본교의 임상실습 교육과정을 벤치마킹하고 국제교류협정을 맺었다.

한 해 평균 국제교류 학생 수는 20여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교류대상국도 미국, 오스트리아, 캄보디아, 일본, 케냐, 네팔, 영국, 헝가리, 아일랜드, 독일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2011년부터 국제교류를 원하는 본교 의전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교류장학금을 지급하고, 이들이 정착한 후 원리금을 상환하는 방식을 통해 재원을 재창출하는 방식을 도입하였고, 베트남 등 제3세계 학생의 본교 임상실습을 지원하는 국제교류장학금도 조성되었다. EMC는 2008년 수상에 이어 2012년 행복나눔인 시상식에서 국제나눔분야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3) 중개연구 활성화 및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이 강화되다.


의과학연구소는 중개연구 활성화 및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및 연구자들의 연구지원을 위해 바이오메디컬 연구역량 강화 심포지엄, 의전원 연구역량강화 프로그램 지원, 의대 자연대 공동연구 활성화 워크샵을 개최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2014년 본부보직으로 의무산학부단장제가 신설되었고 내과학 강덕희 교수가 초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교내학술지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13년 이화의대지(The Ewha Medical Journal)가 Koreamed에 등재되었다. 또한 1999년 처음 도입된 이학석박사 제도는 완전히 정착되어 그동안 연인원 100여명의 학위생을 배출하였다.


4) 새병원 및 의과대학 설립을 위한 부지를 매입하다.


동대문병원 매각과 동시에 이화학당 및 의료원에서는 새 병원 및 의과대학 설립을 위한 부지 선정 및 매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최종적으로 2011년 11월 25일 강서구 내발산동 157번지 일원의 13,091평(43,277 m2)의 부지(지정용도는 의료시설 중 병원, 허용용도는 근린생활시설과 학교 및 연구소)를 211,255,500,000만원에 단독 입찰로 낙찰 받게 된다. 2013년 3월 26일 이화학당은 학교시설용지에 대한 교육환경평가를 완료하고 학교용지 분할을 요청하였다(의료용지 33,360 m2, 교육용지 9,917 m2).


 

 

 

다. 의학전문대학원 3기 (2014-현재)


1) 의과대학 교육목표를 정비하고 의예과 학생선발을 시작하다.


2015학년도에는 의학전문대학원 76명 선발과 동시에 의예과 53명을 선발하였다. 의과대학 체제로 전환되는 2017학년도에는 정원의 30%에 해당하는 23명의 학생을 학사편입으로 추가 선발하여 의학과 총 76명의 정원을 채울 예정이며, 향후 4년간의 학사편입비율을 30%로 유지될 예정이다.

2015학년도부터 시작되는 예과 1학년 교육과정 시행에 맞추어 2013년 교육목표 개정작업을 진행하였고 진료능력과 직업전문성의 확립, 연구능력,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자세 함양이라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다. 초대 의예과장으로는 의학교육학 전공의 권복규 교수가 임명되었고, 기초전공의 출신의 김정아가 특임교수로 임용되었다. 의예과는 종합과학관(현대자동차동)과 헬렌관에 연면적 438.94평(1,451.04 m2)의 의예과 전용공간을 확보하여, 대형강의실 2개, 과사무실, 의예과장실, 교수연구실과 4개의 세미나실과 의과대학 학생회실 등을 두었다.


2) 마곡캠퍼스 시대를 위한 단계적인 준비를 진행하다.


2013년 마곡 새병원과 의과대학 건축설계 현상공모를 통해 2014년 1월 설계업체와 건축모델을 선정하였다(이선욱 총장, 이순남 의무부총장, 정성민 의학전문대학원장, 안홍식 건축본부장). 2015년 1월 16일 건축개시 기념예배를 실시하고 건설산업관리단(CM) 선정, 각종 심의 통과, 시공사 선정 등을 거쳐 2018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동년 10월 공사를 착공을 계획하였다.(최경희 총장, 이순남 의무부총장, 김경효 의학전문대학원장, 강미선 건축본부장).

마곡캠퍼스 건축계획은 다음과 같다. 의과대학 건물은 지하 5층, 지상 12층 규모로 지상 20,139.95 m2, 지하 22,173.67 m2, 총 42,313.62 m2으로 계획되어 있다. 이를 층별로 살펴보면 지하 3~5층에는 주차장과 공조실 등이 위치하고, 지하 2층에는 의과학연구소, 동물실, 공동기기실, 전자현미경실 등의 연구공간이 자리한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은 학생교육 및 편의공간으로 지하 1층에 해부실습실과 도서관, 독서실, 동아리실, 체력단련실을 둔다. 지상 1층과 2층에는 각각 대형 계단 강의실을 두고 1층에는 소강의실과 대회의실, 사무실, 분향실 등이, 2층에는 학생실습실과 행정공간, 그리고 지상 3층에는 평면강의실, 강당, 소그룹실, EMSC, OSCE실 등이 자리할 예정이다. 지상 4~12층은 2개의 독립된 동으로 구성되며 연구동 지상 4~7층에는 기초교수실과 10개 기초교실의 실험실이 8~12층에는 임상교수실이 위치할 예정이다. 기숙사동은 2~12층의 독립된 동으로 구성되며, 수용인원 179명을 목표로 1인실과 2인실로 구성된다. 이로써 마곡캠퍼스의 교육연구공간은 각각 지상 16,909.74 m2, 지하 10,137.73 m2이고, 기숙사가 3230.21 m2, 주차장이 12,035.94 m2을 차지할 예정이다.

2014년(김경효 의학전문대학원장) 의학교육 인증평가가 진행되었고, 본교 의학전문대학원은 당해연도 평가대학 총 13개교 중 6년 인증을 받는 6개교에 선정되었다.

이화의대7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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