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부도 전체 모습>
<석조부도 옥개석 천인상>
<석조부도 탑신부 사천왕상>
명칭 |
(한글) 석조 부도 (한자) 石造浮屠 |
국적/시대 |
고려 939년 |
크기/재질 |
높이 237.0cm, 화강암 |
지정번호 |
보물 제351호 |
유물설명 |
부도는 선사(禪師)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탑(塔)을 일컬으며 승탑(僧塔)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이후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를 갖고 있다. 하부 받침석은 8각으로 각 측면마다 양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고 여러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석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단에는 구름 속에서 양쪽 날개를 활짝 펴고 두 손을 합장한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상단에는 천의 자락을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부상(奏樂天部像)을 배치했다. 1매의 판석으로 만들어진 상대석의 윗면에는 각 우각(隅角)을 따라 연꽃잎이 덮였고 우각을 향해 좌우로 사형(斜形)을 이루는 특징 있는 배치방식을 취했다. 탑신부 또한 팔각이며 우각에 주형(柱形)이 있고, 앞뒤 양면에는 문비(門扉)와 문약형(門鑰形)이 조각되고 그 좌우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남은 좌우 양면에는 보살상을 조각했다.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목조건축의 세부 장식을 충실하게 모방하고 있는데, 옥상에는 굵은 추녀마루 8조(條)가 표현되었고 그 사이에 기왓골이 뚜렷하다. 추녀 밑의 받침부에는 꽃문양과 비천상들을 교대로 조각 배치했다. 상륜(相輪)에는 화염(火焰)무늬가 조각된 보주(寶珠)가 있을 뿐이다. 세부 조각에서 파손과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조화롭고 부도 전면에 볼륨이 강한 상들이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아름답고 품격이 있다. 고려시대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
명칭 |
(한글) 청자상감 당초문 발 (한자) 靑瓷象嵌唐草文鉢 |
국적/시대 |
1918년~1922년 |
크기 |
높이 7cm, 구경 18cm |
제작 |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
유물설명 |
굽 안 바닥에는 ‘秘苑製’ 인장이 찍혀있고 내면 가득 도안화된 모란당초문이, 외면에는 간략한 초화문이 선상감線象嵌되어 있는 청자 발이다. 올리브 그린 톤의 유약에 굵은 빙렬이 있으며, 굽 안쪽까지 시유되었고, 접지면 유약은 깨끗하게 닦아냈다. ‘李王家美術工場’이 필사된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상자에 적힌 ‘李王家美術工場’의 정식명칭은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이다. 1908년 창덕궁 자본을 기반으로 공예전통의 진작을 표방하며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가 그 전신이다. 미술품제작소는 왕실 소용 미술품의 제작, 조선 미술공예의 진작, 일반 수요에 부응한 판매용 제품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왕직 직영으로 운영주체가 변화하며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로(1913~1922) 다시 민간인에게 운영권을 넘기며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1922~1936) 명칭을 변경하며 1936년까지 운영됐다.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이왕가 미술공장’, ‘미술품제작소’, ‘미술공장’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다. 금공金工, 염직染織, 제묵製墨, 나전칠기螺鈿漆器 등 일본인이 선호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부서가 운영됐고, 도자부가 신설된 것은 1918년경이다. 1910~1920년대는 골동 거래와 국토 토굴의 성행으로 청자에 탐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던 시기였다.
청자 수요에 따른 상품성에 대한 기대와 이왕직미술품 제작소의 설립취지인 전통공예의 복원이라는 명분을 결합하여 도자부를 설치했으나 고려청자 재현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청자 구매를 독려하는 당시의 신문기사도 보이며, 전세되는 제작소의 도자기들은 당시 재현청자 가마 중 가장 유명했던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삼화고려소와 한양고려소 청자에 비하면 그 질이 다소 떨어진다. 결국 1922년 도미타 기사쿠의 인수를 기점으로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의 청자 제작은 점차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도자기에는 ‘秘苑製’ 혹은 ‘秘苑燒’라는 명문이 있는데,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가마가 있었던 증거는 아직 찾아볼 수 없어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비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차용했거나 혹은 비원 주변에 작업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매우 드물게 전해지는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제품인 이 청자 발은 유색의 깊이나 문양의 정교함에 있어 고려청자와는 차이가 있지만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 청자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 공예 제작 구조와 제작기술 가늠하게 하는 귀한 유물이다. 학예연구원 황이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