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한글) 청자상감 당초문 발 (한자) 靑瓷象嵌唐草文鉢 |
국적/시대 |
1918년~1922년 |
크기 |
높이 7cm, 구경 18cm |
제작 |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
유물설명 |
굽 안 바닥에는 ‘秘苑製’ 인장이 찍혀있고 내면 가득 도안화된 모란당초문이, 외면에는 간략한 초화문이 선상감線象嵌되어 있는 청자 발이다. 올리브 그린 톤의 유약에 굵은 빙렬이 있으며, 굽 안쪽까지 시유되었고, 접지면 유약은 깨끗하게 닦아냈다. ‘李王家美術工場’이 필사된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상자에 적힌 ‘李王家美術工場’의 정식명칭은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이다. 1908년 창덕궁 자본을 기반으로 공예전통의 진작을 표방하며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가 그 전신이다. 미술품제작소는 왕실 소용 미술품의 제작, 조선 미술공예의 진작, 일반 수요에 부응한 판매용 제품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왕직 직영으로 운영주체가 변화하며 ‘이왕직 소관 미술품제작소’로(1913~1922) 다시 민간인에게 운영권을 넘기며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1922~1936) 명칭을 변경하며 1936년까지 운영됐다.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이왕가 미술공장’, ‘미술품제작소’, ‘미술공장’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다. 금공金工, 염직染織, 제묵製墨, 나전칠기螺鈿漆器 등 일본인이 선호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부서가 운영됐고, 도자부가 신설된 것은 1918년경이다. 1910~1920년대는 골동 거래와 국토 토굴의 성행으로 청자에 탐닉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던 시기였다.
청자 수요에 따른 상품성에 대한 기대와 이왕직미술품 제작소의 설립취지인 전통공예의 복원이라는 명분을 결합하여 도자부를 설치했으나 고려청자 재현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청자 구매를 독려하는 당시의 신문기사도 보이며, 전세되는 제작소의 도자기들은 당시 재현청자 가마 중 가장 유명했던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삼화고려소와 한양고려소 청자에 비하면 그 질이 다소 떨어진다. 결국 1922년 도미타 기사쿠의 인수를 기점으로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의 청자 제작은 점차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도자기에는 ‘秘苑製’ 혹은 ‘秘苑燒’라는 명문이 있는데, 창덕궁 후원인 비원에 가마가 있었던 증거는 아직 찾아볼 수 없어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비원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차용했거나 혹은 비원 주변에 작업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매우 드물게 전해지는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제품인 이 청자 발은 유색의 깊이나 문양의 정교함에 있어 고려청자와는 차이가 있지만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 청자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 공예 제작 구조와 제작기술 가늠하게 하는 귀한 유물이다. 학예연구원 황이숙 |
명칭 |
(한글) 나전흑칠 서안 (한자) 螺鈿黑漆 書案 |
국적/시대 |
20세기 전반 |
재질 |
피나무 |
크기 |
세로 24.5cm, 가로 73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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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 기증 |
유물설명 |
<나전흑칠 서안>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낮은 책상으로 곱고 윤택한 흑칠에 나전으로 비천과 구름무늬를 아름답게 장식한 문방가구(文房家具)이다. 낙선재(樂善齋)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며 근대기 나전칠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이 특히 주목된다. 나전칠기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을 목제품의 표면에 칠하고 조개껍질을 가공하여 만든 자개를 기물의 표면에 박아 장식한 칠공예 장식기법 중 하나이다. 옻으로 칠한 공예품은 표면에 견고하고 단단한 막을 형성하여 오랜 시간 변함이 없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옻 특유의 광택과 깊이 있는 색감으로 실용적 · 미적 가치를 겸한다. 우리나라에서 나전칠기의 역사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에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는 불교 귀족문화의 영향 아래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기술과 아름다움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시대의 나전칠기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화려함보다는 사실적이고 회화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며 왕실뿐 아니라 서민들의 생활용품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근대기에는 기술의 발전을 통한 한층 세련된 나전기법이 선보였으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통 나전칠기의 명품화를 이루며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나전흑칠 서안> 윗면의 가장자리는 띠를 두른 듯 화려한 식물문의 나전으로 장식되었고,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天人)의 모습을 표현한 비천상(飛天像)은 중앙을 기준으로 위, 아래로 배치되었다. 비천상은 무릎을 꿇고 앉아 연꽃 형태의 향로를 들고 부처님께 공물을 바치는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의 모습으로 천의(天衣)와 영락(瓔珞)을 휘날리는 아름답고 신성한 자태를 보이며, 그 주변으로는 보상당초(寶相唐草) 무늬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서안 윗면의 모서리 부분에는 모란당초문, 사방 측면과 네 다리의 외면에는 구름무늬가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구름무늬의 매끄럽고 유려한 곡선 표현은 이전 시기와 다른 근대기 나전칠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1920년경 조선의 나전장 전성규(全成圭, 1880~1940)가 일본에서 들여온 금속세공용 실톱을 나전 제작에 도입했던 기술의 혁신을 보여준다. 나전을 오리는데 실톱을 사용하면서 자개문양의 섬세한 곡선과 세밀한 좌우대칭 표현이 가능해져 전통 주름질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법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전칠기의 근대화를 잘 보여주는 <나전흑칠 서안>은 오랜 시간 동안 전통의 맥락을 지켜온 나전칠기 공예의 아름다움과 근대기에 이룬 새로운 기술문화의 발전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학예연구원 권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