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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윤수정
‘절차에 갇힌 소통’ 인문학으로 구출을 (한겨례신문. 2010.7.28)

‘절차에 갇힌 소통’ 인문학으로 구출을


 

 공동체 위계·폐쇄성 둔 채
규범 따져봐야 ‘불통’ 못깨
현실 뛰어넘는 상상력 필요

 

 이대 학술대회 진은영 연구교수 제안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이 다양하게 분출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다지만, 사람들은 ‘소통 없는 정부’를 비판하며 촛불집회에 나선다. 그들에게는 소통 대신 ‘불법 집회 참가자’ 딱지가 돌아온다. 소통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지만, 단지 서로의 입장과 의사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 연구단은 지난달 30일 ‘소통을 위한 인문적 상상’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40)씨는 ‘소통, 그 불가능성 안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여는 발표를 통해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과 그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인 정리를 시도했다.

 

진씨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편견 등 방해 요소들만 제거하면 왜곡 없는 투명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소통은 어떤 공식처럼 규범화할 수 없는 행위이며, 각자의 입장 속에서

 

 

 

 <진은영 연구교수> 

 

는 이미 보내야 할 메시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메시지를 주고받는 ‘절차’에 대해 따져봐도 ‘소통의 불가능성’만 더해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시도한 ‘소통의 규범화’에 비판을 들이댄다. 아렌트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 있는 경제적 사안들이 아닌, 오직 공동의 문제만 다루는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진실성·진리·정당성 등이 모두 충족되는 말하기만이 보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진씨는 이들의 시도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을 통해 소통을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진씨는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는 다양한 모습의 현실적인 불평등·불균형이 존재하며, 이는 어떤 종류의 규범화를 통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한다. 게다가 경제적인 조건은 말하는 이의 자리를 결정해주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기 때문에 “경제적 사안과 관련된 문제야말로 소통의 핵심적인 주제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 몸’ 이미지를 통해 소통이 일어나는 공동체의 위계화와 폐쇄성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 내부 주체들은 소통 주체들이 각자 서 있는 입장이 모두 다르더라도 ‘전체 공동체를 위한 것’을 내세우며, 공동체 내부의 위계질서를 타고 전해져오는 메시지는 별다른 소통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또 공동체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절대적 타자’와는 소통하는 방법 자체가 없다. 어떤 공동체가 ‘관용’에 근거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난민 스스로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소통의 불가능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절차로 굳어져버린 소통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씨는 ‘두 주체 사이에 확정된 의미를 서로 전달·교환하는 방식의 소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소통의 당사자들이 아예 기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외면하는 대가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자와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경제적 투쟁에 몰두할 때 그들은 오직 ‘먹는 입’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존 경제적 재분배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며 여성·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의 ‘먹는 입’과 함께 말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입은 ‘먹기도 하면서 말하는 입’이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나에게 낯설기만 했던 ‘절대적 타자’로부터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근접성을 발견하는 ‘탈경계적 보편주의’다. 진씨는 이를 “어떤 이들이 우리를 향해 자신들의 고통과 현실에 대해 호소할 때, 바로 그 순간 그 문제가 우리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내게 주어진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날 때에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과학으로 대표되는 ‘소통의 과학’과 다르게 ‘소통의 시학’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 작업에 대해 사회과학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연구를 이뤄낸다면, 인문학은 현실적 조건들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상력을 발명해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진씨는 “새로운 주체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부단한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며, 그것은 당연히 기성 질서와의 ‘불화’를 겪는다”며 “그렇지만 이런 불화의 과정이야말로 소통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를 절차라는 이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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