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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17.10.19
조회수
324
글쓴이
윤수정
'구원과 세속적 성공의 이중주… 한국 개신교의 욕망 해부했죠'

'청부'와 '경건한 지도자', 신앙적 근거 있나?

[서평] 백소영의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칼뱅은 종교개혁자로, 장로교의 창시자로, 제네바를 신정정치로 이끈 지도자로 알려져 있죠. 그가 쓴 <기독교강요>는 그쪽 계열의 학생들에겐 필독서나 다름없죠. 하지만 그가 통치하던 첫 5년 동안 제네바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렸고, 35명은 화형장에서 불타 죽었고, 76명은 도시밖으로 추방되었죠.

어찌 보면 구약성경에서 신정국가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성전(聖戰)을 벌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의 닮은 꼴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것은 '신의 도성'을 세운다는 '경건'의 명분 아래  엉뚱한 자기 '욕망'을 부추긴 행태일 뿐이죠. 칸트의 주장처럼, 그걸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경우, 그로서도 납득할 만한 온당한 행위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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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겉그림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청교도들도 결코 다르지 않겠죠? 그들은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의 배인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상업적이고도 정치적인 모략과 결탁한 행위였기 때문이죠.

백소영의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려주죠.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밤낮없이 애쓰고 노력하여 세상을 그리스도의 도성으로 물들게 하려는 오늘날의 개신교도들은 모두 종교개혁과 함께 청교도 신앙에 영향을 받아 온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경건한 신앙심 속에는 또 다른 '욕망'이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는 지적을 곁들이고 있죠.

이 책을 통해 그녀는 종교개혁이 발흥하게 된 원인을 적나라하게 규명하죠.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만 그것을 촉발케 한 게 아니라는 뜻이죠. 오히려 그들을 떠받든 '부를 가진 사람들', '행정가들', '하급관료들'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합세한 작품으로 진단하죠. 그야말로 경제적인 부와 정치적 힘을 소유한 가톨릭계의 조직에 대한 반발로 말이죠.

"비텐베르크는 당시 인구가 2000명 정도에 불과한, 신성로마제국 변방의 지방 소도시였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던 국제적인 도시국가들, 피렌체, 베네치아, 파리, 런던 같은 곳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신앙 양심에 입각하여 가톨릭의 중세 말기적 행태가 잘못되었음을 선포한 종교 지도자들이 유럽 곳곳에 적지 않았음에도, 왜 하필 독일이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을까?"(36쪽)

종교개혁도 당시 유럽의 변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지적하죠. 그것은 신영복 교수가 어느 책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흡사하죠. 그 책을 통해 내가 생각케 된 건 그것이었죠. 새로운 개혁은 고인 웅덩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흐르는 변방의 물꼬에서 비롯된다는 것 말이죠. 유배지에 끌려간 인물들이나 변방에서부터 변화를 바라는 개혁자들이 그런 흐름의 중심축이 되었다는 것이죠.

이 책의 지적도 그런 흐름과 결코 다르지 않죠. 백소영은, 독일이 그와 같은 개혁의 진정한 진앙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규제할 만한 단일한 정치조직이 없었던, 이른바 변방 중의 변방인 까닭이요, 그만큼 곪을 대로 곪은 내부의 갈등이 그렇게 외곽에서부터 한꺼번에 터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죠.

그와 같은 종교개혁의 기치는 이후 영국의 청교도들의 개혁신앙으로 확대되는데, 그들에게는 '경건한 신앙심'이 세상 속에 활활 타올랐다고 하죠. 여전히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하고, 그를 위해서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세상 흐름을 '신의 도성'으로 잠식해야 한다는 뜻이죠.

다만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1세대 청교도들은 경건이 성공을 보장한다거나, 빈곤이 심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하죠. 신자 개인으로 하여금 세속적 관심을 적게 하여 경건 훈련에 힘쓰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17세기 말 정착에 실패한 사람들과 하층민 출신의 이주자들이 뉴잉글랜드의 도시로 이주하면서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들로 인한 사회문제가 불거지자, 청교도 2세대 설교자들은 '가난'을 '죄와 빈곤'으로 연결짓기 시작했고, 3세대 목회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종교적인 잣대로 비난했다고 말이죠. 그것이 18세기를 지나면서 청교도 설교자들은 선거권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적 구조와 손을 잡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진단하죠.

"하나님의 뜻은 경건한 신자 개인의 사회경제적 성취나 성공 여부에 있지 않다. 성서가 증언하고 예수가 확증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한 개인의 사적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더 나아가 우주) 공동체적 질서 재편의 문제이며, 때문에 이 커다란 사업의 전개 과정에서 경건한 신자가 맡은 몫이 천편일률적으로 '성공'과 '번영'일 리 없다. '소명'의식도 훌륭하고 '주의 도구'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강조한 개신교 윤리 자체야 나무랄 데 없는 생활 격률이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청부'와 '경건한 지도자'의 영광으로 주어진다는 주장에는 신학적 근거도 신앙적 정당성도 없다는 말이다."(201쪽)

이른바 한국개신교인들에게 고하는 그녀의 당부죠. 그만큼 한국개신교는 18세기 영국의 제 3세대 청교도 목회자들의 사상과 신학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다는 지적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깨끗한 부자'와 '경건한 지도자' 사이에는 아무런 신앙적 명분이나 연관성이 없다는 게 어느 정도 타당치 않나 싶기도 하죠.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부탁할까요? 일부 개신교 신학에서 주장하는 '번영신학' '성공신학'에 너무 열을 올리지 말라고 말이죠. 성공을 명분으로 경건에 열을 내면 낼수록 사회 질서는 더욱 혼탁할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율배반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까닭에서요. 그것보다는 개개인의 욕망을 제거하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보편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녀는 마무리하죠.


 

권성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7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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