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독일과 주변국: 독일항복(1945년 5월)부터 독일-프랑스 엘리제조약(1963년 1월)까지 l
미하엘 가이어
(독한협회 회장, 전 주한독일대사)
독일 연방의회와 프랑스 국민의회는 작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베를린의 사학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가 말하듯 독일의 "서구로의 긴 여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되었던 엘리제조약의 50주년을 기념하였다.
통일이 이루어지던 1990 년의 독일은 오늘날의 한국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 동독이 붕괴되기 전 이미 동독이라는 국가가 40년 동안 근간으로 삼아 온 정치적 정당성을 잃었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다. 둘째, 독일은 당시 역사상 처음으로 주변국들이 모두 우호국들이었는데, 본 발표에서는 이에 관하여 다루고자 한다.
엄밀히 말하면 위의 표현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선 국가들 간에는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지, 우호관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봉기와 서독의 동독 흡수를 지지한 이들의 정치적 의도 또한 독일에 대한 넘치는 동정이기보다는, 무너져 가는 소련에 대한 전략을 마무리시키려는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인 조지 케넌은 이러한 전략을 "봉쇄정책(containment)"이라 명명하였으며 후에 이로부터 "격퇴전략(rollback)"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동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싸움 역시 이 맥락에 속한다.
본 발표에서는 1945년 제3제국의 몰락에서부터 엘리제조약에 이르는, 20년이 채 안 되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립적인 독일외교정책이 시작된 기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정점이었던 "얄타 시대", 1942-1943년 겨울 스탈린그라드 앞에서 독일 제6군을 섬멸시키고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 결정적인 사건 이후의 시대로 돌아가 보겠다. 미국, 영국, 소련은 독일 몰락 이후 세계의 미래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하여 전쟁 동안 세 번의 회담을 가졌다. 1943년 9월 28일-12월 1일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이 테헤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이미 영국과 미국 사이에 근본적으로 합의되었던, 오늘날 "디데이(D-Day)"로 잘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논의되었다. 처칠은 독일을 2개의 국가로, 루즈벨트는 5개의 국가로 나눌 것을 제안하였으며, 스탈린은 5-10만명에 이르는 독일간부들을 처형시키고자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들 3국이 동부의 커즌과 서부의 오더-나이세를 경계로 삼는 폴란드 국경선의 서측 이동에 대하여 모두 동의를 했다는 점이다. 소련은 북측의 동프로이센 지역을 얻었다. 독일과 폴란드에게 불리한 이러한 합의 결과는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의 유럽연합 내에서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경계선이 큰 의미가 없지만, 전쟁 직후에는 엄청난 규모의 이주와 추방 및 이로 인한 손실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다음 회담에서 3국은 독일을 3개의 점령지역으로, 후에 프랑스의 영향력으로 4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베를린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유럽이 서구와 소련의 영향권으로 확고히 분할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얄타 시대"이다. 이러한 "얄타 시대"의 종식에 대한 기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RGW)가 해체되면서 피어나게 되었다.
마지막 회담은 1945년 5월 8일 독일군의 무조건적 항복 직후 1945년 7월 17일-8월 2일 포츠담에서 개최되었으며, 독일의 전후 외교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스탈린과 잘 통했던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나고 껄끄러워 보이는 트루먼이 그의 뒤를 이었다. 처칠은 회담 기간 중 낙선하면서 애틀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의사권과 정부가 부재하는 독일에 대한 분할이 정부를 대체하는 기구인 연합국 통제위원회와 함께 승인되었다. 또한 폴란드와 소련에게 넘겨진 지역 및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거주하던 원래 7백만 명이었던 독일인들 중 4백만 명에 대한 이주가 승인되었다. 약 1천2백만 명의 피 추방자들로 인하여 서독은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과제에 직면하였다. 작은 규모이지만 동독 역시 이러한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우선 독일의 통일, 무엇보다 같은 해에 진행된 폴란드와의 국경조약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수를 상기하는 것이다. 소련: 2천5백만 명, 독일: 6백만 명, 미국: 30만 명.
전쟁 직후 독일은 정부가 없는 나라, 도시들과 산업시설들이 파괴된 나라였으며, 국민들 중 수백만 명의 남자들이 전쟁포로로, 또 다른 수백만 명은 추방되거나 이탈하여 살아가고 있는 나라였다. 과거 주축세력이었던 이탈리아나 프랑스 및 영국과 같은 승전국들 역시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특히 철의 장막이 빠르게 걷혀 버린 동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였다. 건재하게 살아남은 것은 유럽에 대한 패권을 나누어 가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세력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법적인 논란들을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소련 점령지역에서의 즉결재판은 더욱 그러하였다. 소련 점령지역 내 소련군에 의해 다시 재개된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12만 명 중 4만 2천명에 대한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사유재산 국유화의 "사회주의적 성과"는 크고 작은 토지소유주들에 대한 몰수, 북한을 떠오르게 한다. 이후의 새로운 소유주들 역시 수십년간 "농업생산협동조합(LPG)"에 소속되어야 했다. 산업계도 마찬가지였다. 전 소유주가 나치였든 정권반대자였든 이와 상관없이 거의 1만 개에 달하는 기업들이 아무런 보상 없이 국가소유로 이전되었다.
서구연합의 엄격한 주시 하에 3개의 서구 점령지역 내에는 곧 다시 정치적 활동이 살아났다. 그 중 가장 두드러졌던 인물로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쾰른 시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던 콘라드 아데나워와, 거의 10년 동안 여러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쿠르트 슈마허가 있다. 아데나워는 더 이상 카톨릭 정당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기독교 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U)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며, 슈마허는 재수립된 사회민주당(SPD)의 당수가 되었다. 두 정당 모두 독일의 전후역사 전반에 있어,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정당들이다.
스탈린의 핵심적인 관심사는 미국을 유럽에서 다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리스에서 내전에 가까운 논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권이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유사한 상황이 이탈리아에서도 일어났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유럽 민족들의 자유수호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수립하였다. 1948년 3월 소련에 대적하는 서구연합이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국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스탈린은 연합국통제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90-91년 소련이 붕괴되기까지 지속되었다. 냉전은 독일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독일 전후세대의 삶과 생각을 지배하였다.
서구세계의 화폐개혁에 대한 소련의 화답으로 1948년 6월-1949년 5월 베를린이 봉쇄되었다. 미국, 영국 등은 2백2십만명에 달하는 베를린 시민들의 생계를 공수로 지원하는 용감한 노력을 보였다. 이러한 냉전의 첫 절정을 겪으면서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수립되었다. 같은 해 5월 연방의회는 임시 기본법인 독일 전후헌법을 제정하였다. 서구의 승전세력들은 입법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보권(Vorbehaltsrechte)을 고집하였다. 이 유보권의 잔재는 오늘날까지도 미국국가안전보장국(NSA) 첩보활동과 관련하여, 미미하지만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많은 개정을 거친 이 기본법은 통일 이후에도 독일의 헌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존중하고 있는 독일헌법은 65년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법인 것이다.
1949년 9월 아데나워를 연방총리로 만든 첫 연방의회선거 다음 날, 모든 연방법에 대한 거부권을 승전국들에게 보장하는 점령조례가 발효되었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서베를린에서는 모든 연방법이 의회에 의해 베를린법으로 변환되어야 했다.
동독과 서독 모두에서 배상철거작업이 진행되었다. 독일의 산업시설들이 철거되고 소련, 영국, 프랑스 및 기타 국가들로 운송되었다. 전쟁배상 및 독일의 산업재건 방지를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작업은 동서독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아데나워의 "유화정책"을 비난하였으며, 슈마허는 그를 "연합국의 총리"라 일컬었다.
서구에서는 유럽공동체(EG)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슈만과 모네는 독일의 중공업을 공동관리, 즉 프랑스의 관리 하에 통제하고자 하는 슈만계획을 구상하였다. 1951년에는 오늘날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발전사의 이러한 가속화에는, 많은 독일인들이 3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우려하였던 한국전쟁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서기장은 1950년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의 사례는 남한, 혹은 본에 자리 잡은 이러한 꼭두각시 정부가 언젠가는 결국 국민들의 의지로 밀려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교훈해 준다."
냉전과 한국전쟁은, 기독교민주당이 찬성하고 사회민주당이 반대하던 독일의 재무장 논의의 근간이 되었다. 1952년 5월 10일 소련 정부는 서구 승전국들에게 중립적 독일 위한 평화조약을 제안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것이 기회를 놓친 것인지, 혹은 서구세력을 분리시키고 미국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한 스탈린의 허무한 시도였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후 수년 간 지속되었다. 서독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1955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서구 승전국들은 베를린 및 전 독일에 대한 자신들의 권한유보 하에 "독일조약"을 통하여 점령체제를 종결시켰다. 동시에 유럽방위공동체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1954년 결국 프랑스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동독에서는 숙청이 계속되었고 서베를린 및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1953년 6월 17일에는 소련 점령군의 개입으로 대형봉기가 진압되었는데, 이는 후에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에의 개입 및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한 무력진압의 선례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그리고 동독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서독에서는 통일보다는 자유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서독은 1957년 3월 "로마조약"을 계기로 첫 정점을 이룬 유럽 통합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8년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최후통첩과 함께 평화조약을 제안함으로써 서구세력을 분리시키고자 다시금 시도하였다. 이는 연방군이 핵탄두에 대한 소유권이 미군에 있는 미사일 장비로 무장한 것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였다. 소련의 이러한 제안과 위협은 미국과 영국에 어느 정도 효력이 있었으나, 아데나워와 드골의 결연함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1961년 흐루시초프가 또 다시 베를린 최후통첩을 선고하였다. 이후 1961년 8월 13일 동독 지도부는 소련의 동의 하에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고 국경강화작업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의 꿈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반자본주의적 보호막"은 동독뿐 아니라 소련세력권 하의 모든 국가들을 지속적인 곤경에 빠뜨렸다. 감옥 울타리 같은 모습의 장벽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몰락을 상징하였다.
서독이 유럽의 인정받는 민주주의국가 대열에 다시 편입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정적 계기는 1963년 1월 22일의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이었다. 이 조약을 기념하는 50주년 행사가 작년 베를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시점을 전후로 독일의 정치와 외교정책은 "대서양파"와 "드골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조약과 더불어, 할슈타인원칙에 근거하여 전 독일에 대한 유일대표성(Alleinvertretung) 요구를 관철시키는 일은 수년 간 독일 외교정책의 테마였다. 이러한 논쟁으로 인하여 독일의 정당들도 나뉘어졌다. 사회민주당원들은 주로 "대서양파"였으며, 이러한 양분화 현상은 1963년 1월 드골이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반대하고, 1966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 군사동맹을 탈퇴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서독의 연방정부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외무장관을 통하여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공식 찬성하였다. 연방의회가 아데나워 총리의 동의 하에 미국, 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경제공동체와 독일의 협력관계 및 영국의 가입, 케네디 라운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차원의 관세인하를 인정하는 엘리제 조약법 전문을 결의하자, 프랑스는 더욱 분노하였다. 이는 유럽 내 독일-프랑스만의 특별노선에 대한 분명한 거절이자, 드골에 대한 거절이었기 때문이다. 전후독일에 큰 영향을 끼친 아데나워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14년이 지난 1963년 10월 아데나워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자리를 이었다. 그 직전 1963년 6월 존 F. 케네디가 독일과 베를린을 방문하여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회민주당의 당수이자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1963년 7월, 독일문제는 소련에 대적하여서가 아니라 소련과 함께 해결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이 연설이 있기 하루 전 에곤 바르는 한 발 더 나아가 "접근을 통한 변화"를 주창하였다. 이 개념은 후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에서도 발견된다.
위에서 설명한 20년의 시간 동안 서독은 왕따에서 점점 존중 받는 파트너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냉전을 통하여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승전세력들 특히 미국의 엄격한 주시 하에 진행되었다. 독일은 주권손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를 배웠다. 독일의 외교정책은 상당한 외부정치적 강압이라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와 원자력이라는 보호막 뒤에서 독일은 역사상 이례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계속해서 과거의 큰 독일을 꿈꾸는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망상가들로 전락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 20년 간의 독일 및 유럽의 역사는 한국에게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것이다. 유럽의 통합과정에서 독일이 얻은 파트너들과 같은 주변국이 한국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추구하고 있는 유사한 노력은 아직 시작단계에 있을 뿐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처럼 한국과 일본이 유익한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 장담하기 어렵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 이상 정치인들 간의 프로젝트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1천2백 건의 도시협력 및 2천 건 이상의 학교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탄탄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역시 "서구로의 긴 여정", 즉 일본 및 동남아시아로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어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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