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No.
11564727
Date
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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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국제통상협력연구소
분과세션1_독일_이은정

공공외교와 통일 l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교 교수)

 

2014년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5주년그리고 2015년은 독일 통일 25주년이 되는 해이다이를 기념하여 2014년 가을부터 독일 여러 지역에서 통일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통일 이후 40년 간 냉전의 틀에서 상이한 정치체제 하에서 긴장관계에 놓여있었던 동서독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이후 2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하나의 통합된 사회를 이룬 것은 분명히 경이로운 성과이다공공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독일은 공공외교를 통해 통일과 통합의 성공적인 결과를 알리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오히려 통일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잘못 처리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독일 내의 논의가 그대로 국제사회에 전해지고 있다그 결과 독일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인식 또한 높은 통일비용과 불완전한 내적 통합 등으로 함축될 수 있을 정도로 부정적인 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분단국으로서 통일문제에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경우 현 정부가 통일은 대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독일 통일에 대한 감성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한독 간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통일정책 경험 공유를 위한 협력 사업에서도 독일 측의 접근방식은 성공적인 통일을 감성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객관적 비판적 분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통일과 통합 과정에서 동독 경제의 붕괴와 실업률의 증가화폐교환정책의 문제점선반환 후보상의 원칙에 입각한 소유권 정책의 문제점 등과 같은 주제는 한국에서 열리는 독일 통일에 관한 학술회의의 단골주제이다반면 통일 이후에 태어난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분단과 통일이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을 정도로 현재의 독일이 성공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성공적인 통일의 성과를 홍보하지 않는 데에는 역사적인 경험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유가 있다거기에 독일 공공외교 방식도 포함된다독일의 공공외교 정책의 목표는 국가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한 상호 교류와 대화‘라고 독일 외무부는 설명한다. 이런 목표를 갖고 있는 독일의 공공외교 정책이 간접적으로 국가 브랜드의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독일 국가가 직접적 국가브랜드 향상을 위한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 독일은 이미 19세기부터 다양한 기관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외교“의 이름으로 공공외교를 실천해 왔다이들 다양한 기관들은 정부의 일상적인 외교정책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정한 독자성을 갖고 소통과 교류를 지원하는 문화외교의 개별적인 행위자이다그런 의미에서 방법의 다원성과 행위자의 독자성이 독일 공공외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원성과 독자성이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독일의 이미지 향상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BBC가 매년 25개 국가 26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통해 우리는 독일이 지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가장 높은 나라로 선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BBC정도의 공신력 있는 언론기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언론들이 그 자체에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는 점이다소수의 지방지가 가쉽거리 정도로 이 조사결과를 보도하였을 뿐이었다그나마 이 설문조사 결과를 비교적 상세한 보도한 베를린너 쿠리어와 같은 지방지의 보도도 왜 독일이 가장 호감도가 높은 나라로 꼽히는지 오히려 놀랍다는 식의 반응이다이 신문은 무엇이 독일을 호감 갖는 나라로 만들었는지 구체적인 원인을 찾는다이 원인을 찾는 과정 또한 아주 흥미롭다마티아스 혹스라는 미래전문가의 코멘트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제 독일이 아주 관대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그렇지만 경제적으로 강하고 사회적 균형이 잡힌 정의에 민감하며 개혁적인 나라이고많은 성과를 올리면서 친환경적이고 창조적인 국가라고 알고 있다그와 반대로 독일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면 우리가 마치 아주 심각한 사회적 붕괴를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이제 우리는 우리의 강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만하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한다그러나 이 기사의 뉘앙스는 끝까지 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가 정말 친절하다고 세계가 본단다“라고 기사를 정리한다.

물론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는 조사결과에 대해 독일 언론이 호들갑스럽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이미지가 향상되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독일 또한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자국 이미지 향상을 추구한다그러나 독일은 공공외교에서 독일의 이미지 향상을 직접적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그 좋은 예가 바로 독일이 통일과 통합의 역사적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는 방식이다공공외교를 담당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감성적 접근보다는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독일통일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다양한 행위자들의 활동은 독일 정부의 일상적인 외교정책으로부터 독립적이며 활동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있다그런 면에서 독일은 국가 브랜드의 홍보에 집중하는 영미권과 아시아권의 국가들과 차별되는 공공외교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원성과 행위자의 자율성 독자성에 바탕을 둔 문화외교 그리고 일상적 외교관계와 문화외교관계의 분리 (Entkoppelung)로 특징 지워지는 독일 공공외교의 특성을 우리는 분단 시기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1949년부터 1990년까지 격변했던 정치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간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와 소통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그리고 이것이 동독과 서독이 서로 완전히 괴리되지 않았던 중요한 원인이었다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아직 안고 있는 한국에게 독일 공공외교의 기본 원칙이 특별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이 글에서는 먼저 독일 공공외교 정책의 기본적인 원칙을 분석하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대동독 정책에도 반영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 않고 있는 공공외교의 개념을 먼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공공외교의 이론을 통해 독일이 고도로 발전된 공공외교 정책을 구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공공외교

공공외교 개념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냉전이 종결된 후의 일이다영미권에서는 지난 20여년 사이에 공공외교라는 용어가 학술적 전문용어로 받아들여지고 학문의 한 분과로 자리 잡게 되었다그러나 독일어권에서는 아직까지 public diplomacy에 상응하는 용어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일반적으로 그냥 public diplomacy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또는 독일어로 oeffentliche Diplomatie또는 diplomatische Oeffentlichkeitsarbeit aussenpolitische Oeffentlichkeitsarbeit또는 a uswaertige Kulturpolitik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공공외교라는 용어는 아직까지 하나의 개념 정의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학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Hans N. Tuch와 같은 학자는 공공외교를 정부가 자국의 이념과 이상 그리고 제도와 문화 그와 함께 목표와 현실정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외국의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으로 정의하며조셉 나이는 공공외교가 여론을 대상으로하는 외교이며 실질적인 외교‘라고 규정한다. 한편 Benno Signitzer Timothy Coombs는 공공외교를 한 국가의 정부와 민간인 그리고 단체가 다른 국가의 외교정책 결정을 직접 좌우하는 여론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Jarol B. Manheim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공공외교를 정치선전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Benno Signitzer는 공공외교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이원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공공외교의 기본기능은 이해와 설득의 이원성을 통해 드러난다그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정보를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소통을 추구하는 것이다정치적 정보 제공의 목표는 설득을 통해 대상 국가의 목표집단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그런 경우 대부분 단기적인 설명 또는 자국 정부의 구체적인 입장과 태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반면에 문화적 소통의 목적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국 사회 전체 또는 한 분야에 대한 상호 이해를 돕기 위한 일종의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치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일간지주간지라디오텔레비젼와 같은 소위 말하는 패스트 미디어‘가 동원되고문화적 소통을 위해서는 영화언어강좌학술교류, 문학낭송회, 전시회 등으로 대표되는 슬로우 미디어‘가 활용된다.

 

이러한 이원적인 접근을 통해 그는 공공외교의 다양한 양식을 모두 포괄하는 이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2010에 독일의 공공외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발표한 다니엘 오스트로브스키 또한 다양한 공공외교이론을 종합하여 하나의 통합이론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그는 우선 공공외교의 대상을 국민언론인전문가 그룹으로 분류한다 (그림 1). 그에 따르면 공공외교는 그 대상집단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이를 위해서는 홍보활동과 문화 교육 그리고 네트워크 형성 등과 공공외교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동원된다고 본다. (그림 2).

궁극적으로 보면 공공외교가 자국의 이념을 홍보를 통하여 외교 대상국 국민 대중의 의견을 조작“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외교라는 개념 자체가 사용되기 시작할 때에 정치선전“과 아주 밀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몇 몇 학자들은 심지어 공공외교와 냉전기에 이루어진 정치적 선전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그 결과 공공외교 개념과 정치선전 개념 간의 분리 문제는 지금까지도 공공외교에 관한 학문적 토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공공외교 개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학자들은 공공외교라는 말은 정치선전을 듣기 좋게 포장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사실 많은 학자들이 냉전이 종료되는데에 공공외교가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공공외교 개념이 정치선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그런 의미에서 다니엘 오소브스키는 정치선전도 공공외교의 세계에 포함시킨다단지 그것은 공공외교의 다양한 양식 중에 하나라고 본다물론 그러한 방식의 공공외교가 상대국의 국민들로 하여금 자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호감도를 갖도록 하는데 어떤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할 것이다오소브스키는 정치선전, 정보전달, 상호대화 등 다양한 공공외교 양식이 일반적으로 호감도와 신뢰도의 형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기 위하여 그림 3의 모델을 만들었다그에 따르면 상호이해를 위한 대화를 추구할 수록 호감도 신뢰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속성을 갖게 된다단순하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고광고의 경우 정치선전과는 달리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는 않겠지만 궁극적으로 정보를 조작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선전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물론 냉전 시기에 보았던 것처럼 이런 형태의 공공외교활동이 조건에 따라서는 적절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성공적인 결과를 거둘 수도 있다그러나 분단시절 독일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냉전체제 하에서도 지속적인 교류와 대화를 통한 이해증진이 신뢰도를 높이는데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 소통과 교류를 위한 독일의 문화외교

2008년에 발표된 독일 연방정부 외무부의 자료를 독일 외무부는 지그니쳐Signitzer처럼 공공외교를 이원적인 성격의 것으로 규정하면서 독일이 보는 공공외교는 영미권에서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독일 공공외교의 목표가 세계 여론에 가능하면 포괄적으로 독일을 알리는 것이며 그를 위해 과장되지 않게“ 독일의 강점을 알리는 것, 그리고 문화와 소통을 신뢰할 수 있는 … 독일 외교정책의 핵심요소로 삼아 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직접 얻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일 외무부는 공공외교를 위해 통일된 전략 정책을 수립하거나 또는 새로운 중앙집권적 기구를 신설하지 않았다. 단지 2003년까지 연방정부 홍보처 (Bundes Presseamt)에서 담당해 오던 외국 주민들과의 소통업무를 외무부에서 주관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독일 정부가 공공외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실제로 독일은 공공외교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오래 동안 문화외교“의 이름으로 다양한 기관과 경로를 통해 공공외교를 수행해 왔고 현재도 수행하고 있다.

독일의 문화외교는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 시기에 시작되었다이 시기에 독일제국의 영토에 거주하지 않는 독일인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민간조직이 만들어졌다. Deutscher Schulverein과 같은 조직이 1881년에 결성되었고 이 조직은 나중에 Verein fuer das Deutschtum in Ausland (VdA) 그리고 Verein fuer Deutsche Kulturbeziehungen im Ausland 으로 개칭하였다이러한 민간단체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외무부에 문화국이 설치되어 외국에 거주하는 독일인(Auslandsdeutsche)과 관련된 민간단체를 지원하는 한편 대외홍보 업무는 수상실에서 관할하게 되었다이러한 업무분할은 1945년 이후 서독에서도 지속되었다.

1945년 이후 서독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문화외교를 통해 세계 속에서 독일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독일문화원으로 불리는 괴테 인스티튜트 또한 이 시기에 새로 구축된 문화외교 조직이다괴테 인스티튜트는 원래 1918년에 민간단체로 창립된 독일 아카데미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교사를 훈련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다이 기관은 괴테 인스티튜트로 새로이 개편된 후에도 바이마르 시기와 동일한 업무를 주로 담당하도록 하였다독일 외무부는 1950년대에 괴테 인스티튜트로 하여금 모든 독일문화원을 관할하도록 하여 그 활동영역을 확장하였다현재 세계 92개 국가 145 도시에 괴테 인스티튜트가 있다괴테 인스티튜트는 자주 영국 문화원 British Council과 비교되지만 실질적인 기능을 보면 영국문화원보다 훨씬 제한적이다그 이유는 문화 활동과 독일어 교육 외에 학술교류 등 교육과 관련된 기능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재단과 독일학술교류처 즉 DAAD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은 1953년에 연방정부에 의해 다시 부활된 이후 현재까지 2000개가 넘는 학술교류프로그램을 통해 130여개국으로부터 25000명이 넘는 학자들을 독일로 초청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이들이 현재 훔볼트 네트워크의 동문으로 활동하고 있다이들 중에는 48명의 노벨상수상자도 포함되었다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학술교류지원기관이라는 DAAD 1925년에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지원받은 사람이 독일인을 포함하여 1 5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독일어 교육과 학술교류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기관들 외에도 후리드리히 에버트재단콘라드 아데나워재단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한스 자이델재단 등과 같은 정치재단도 독일의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한다이들 정치재단들은 대부분 세계 각국에 사무소를 설치하여 직원을 파견하여 직접 프로젝트를 수행하거나 현지의 파트너 기관과 협력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경우 세계 107개 지역에 사무소가 있으며 콘라드 아데나워재단은 80개국에 사무소가 있다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과 한스 자이델 재단의 경우 지역에 설치된 사무실의 수는 적지만 100여 국에서 다양한 형태의 경제개발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이들 정치재단은 나아가 연방교육부와 경제개발협력부의 지원을 받는 장학프로그램을 갖고 있다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의 경우 2011년에 선발된 장학생 2650명 중에 외국인이 280명 포함되었다각 정치재단의 외국인 장학생들 또한 DAAD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의 펠로우들처럼 각자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교육 학술교류 지원기관과 정치재단 외에 경제개발협력을 위한 지원기관인 Deutscher Entwicklungsdienst (ded)와 재난구조 기구인 Die deutsche Bundesanstalt Technische Hilfswerk (THW) 또한 독일의 공공외교 활동을 담당하는 행위자에 속한다.

이렇게 독일의 공공외교는 연방정부의 예산을 받는 다양한 기관즉 다양한 행위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이들 행위자들은 각자의 고유한 Agenda를 갖고 있으며 각자의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 활동한다물론 이들의 Agenda가 독일의 문화외교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이들 모든 기관의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국제사회에서 독일국가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서 독일이 호감을 받는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장기적인 파트너관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그러나 독일의 문화외교가 하나의 통일된 컨셉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볼프강 레페니스는 독일의 사회철학은 전통적으로 정치보다는 문화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해 왔으며 특히 1945년 이후에는 문화외교정책이 외무부의 일상적인 외교정책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그에 따르면 독일의 문화외교정책이 외무부의 일상적인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시각은 독일이 권력국가가 아니라 문화국가“라는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독일의 문화외교가 일상적인 외교정책으로부터 독자적인 자율성을 갖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증명해 주는 흥미 있는 조사결과가 있다. 2013년에 일메나우 공대 Public Diplomacy연구팀이 독일의 문화외교 행위자들을 대상으로 공공외교에 관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각 기관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Public Diplomacy에 기반하여 자신의 전략을 세우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였고 에버트 재단, ded는 우리는 공공외교 개념을 갖고 일하지 않는다.“ 또는 우리 조직에서는 이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어떤 기관은 이 용어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답하였다이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독일 문화외교 행위자들에게 공공외교라는 개념이 여전히 생소한 것이라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독일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공공외교 개념을 수용하였다는 사실 조차 이들은 알지 못하였다.

우리가 이 조사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공공외교“ 개념에 대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다공공외교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답에는 이 개념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일메나우 대학의 설문조사팀은 그 원인을 독일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서 찾는다여기서 독일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라면 나치체제 하에서의 경험을 의미한다나치 체제 하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존재하던 문화외교 조직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은 더 이상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그 결과 독일의 전통적인 다원적 문화외교는 나치에 의해 일괄적으로 통제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정치적 목표를 공격적으로 선전하는 외교정책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정치선전은 외무부가 아닌 나치 조직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졌었다. 나치 체제 하에서의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외교에서 정치적 선전“이라는 용어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 문화외교를 담당하는 행위자들이 공공외교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자주 사용되는 국가 이미지 구축국가 이미지 마케팅또는 국가홍보와 같은 용어를 들으면 우선적으로 정치적 캠페인“을 연상하고 그것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결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독일 문화외교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행위자들이 스스로를 공공외교의 담당자로 간주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공공외교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의 이론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공외교는 정치적 선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독일 연방정부 외무부가 공공외교 개념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실질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독일 문화외교의 주요 행위자들이 공공외교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이미 언급한 것처럼 문화외교를 외무부의 일상적인 외교정책과는 별개의 독립적이고 자율성을 갖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여전히 지배적인 현재의 상황에서 이와 관련하여 어떤 본질적인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독일 문화외교 행위자들이 공공외교 개념 자체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외교의 이론틀에서 볼 때 독일은 이미 고도로 발전된 공공외교를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외교정책과 분리(Entkoppelung)되어서 이루어진다그 과정에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며행위자들이 각자 장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대화가 지속될 수 있는 틀을 만든다바로 이런 독일 문화외교의 원칙이 분단 시기 내독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 분단과 통일 그리고 독일 문화외교의 기본원칙

공공외교 연구자들은 냉전이 종결되는데 공공외교 특히 미국의 공공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그렇다고 냉전의 종식과 미국 서방세계의 공공외교 간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증명되었다고 실제로 말 할 수 있을까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작업은 이 논문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구체화시킬 수는 없다단지 동독 비밀경찰의 책임자였던 마르쿠스 볼프가 유럽 자유방송“이 동구사회에서 공산체제에 저항하는 일반여론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그의 회고록에 기록한 것을 보면 이런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냉전의 종결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어서 통일까지 이어졌다물론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동독의 반체제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원한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었지 동독을 서독과 동일한 사회로 만들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그러나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을 때 다수의 동독 주민들은 1990 3월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신속한 통일을 선택하였다그것은 동독 주민의 절대 다수가 서독체제를 실질적인 대안으로 보았다는 것다시 말해 서독에 대해 근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공공외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상대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국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서독의 대동독 공공외교가 아주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분단 시기 동안 서독 정부가 대동독정책을 외교정책의 틀에서 다룬 것은 아니다서독 정부는 내독관계를 다른 외교정책과 분리하여 수상실과 내독성을 통해 관할하였다동베를린에 설치된 서독의 상주대표부의 경우 외무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수상실에 소속되었다반면에 동독은 서독을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서독의 수도 본에 주재하는 동독 상주대표부의 대사를 외무부에 소속시켰다서독이 동독과의 관계를 외교관계로 간주하지 않은 이유는 서독이 두 개의 주권국가가 독일 영토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반면 동독은 지속적으로 두 개의 주권국가 원칙을 고수하였다이러한 정책적인 차이는 1970년대 이후 신동방정책에 의해 동서독 관계가 화해와 평화공존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렇게 내독관계는 외교관계와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졌지만 서독은 내독관계에서도 외교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적 정치적인 관계와 다른 문화 경제적 관계를 분리하는 정책을 취하였다그리고 동서독 간의 문화 사회적인 교류에 각자의 Agenda를 갖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였다이런 교류 또한 문화외교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일한 중앙기구에 의해 획일적으로 통제되지 않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동서독 간의 교류 또한 독일의 문화외교와 마찬가지로 방식과 행위자의 다원성이 그 특징이었다.

내독관계에서 문화 사회 경제적인 관계가 일상적인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동서독 간의 문화관계가 아주 광범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두 국가 간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도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특히 1950년대 서독이 할슈타인독트린을 외교정책의 기본노선으로 정하고 국제사회에서 동독을 고립시키기 위해 모든 외교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에 동서독 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결하던 시기에도 공동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인식이 독일인들의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준거틀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강조한다예를 들어 독일 고전문학은 종전 직후 이념적 체제적 경계를 넘어 동서독을 연결해 주는 고리가 되었다.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문학행사 그리고 1955에 쉴러 서거 150주기를 기념하는 동독과 서독의 문학행사에 현대 독일문학의 거성인 토마스 만이 참석하여 독일인이 문화유산을 공유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토마스 만 스스로가 공동의 문화적 정신을 바탕으로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다그것은 1955 4 3일 동독의 바이마르에서 열린 쉴러 기념행사에서 행한 그의 연설을 통해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1995년 쉴러의 해가 우리의 생각과 실천 속에 조국과 문화가 하나라는 의식을 강화시키기를 기원합니다. (…) 쉴러의 마음 속에 타오르고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애국심의 불꽃이 독일 청년들의 심장을 끓어 오르기를 바랍니다.

물론 동서독 간의 문화교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항상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59 1 11일에 열린 쉴러 탄생 200주년 기념식에서 동독의 문화장관이었던 알렉산더 아부쉬는 쉴러의 문학적 유산이 동독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그의 발언은 당연히 자신만이 정치적 정당성을 갖는 유일한 독일국가라고 하는 서독의 주장을 겨냥한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간의 문화교류가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다이미 1950년대부터 라이프찌히 도서박람회에 서독의 출판사들이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스바덴에 적을 둔 서독의 인젤 출판사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서독의 출판사가 직접 협력하는 경우도 있었다이들은 1960년까지 라이프찌히 도서박람회에 공동으로 전시하면서 서독의 인젤출판사를 인젤출판사 비스바덴 지부로 표시하기도 하였다독일의 도서수집가들이 사랑하던 문학전집 인젤씨리즈는 출판사가 동서로 갈라진 이후에도 오랜 동안 하나의 씨리즈로 출판되었다.

이렇게 출판사 간의 교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서독이 조약을 통해 양국 간의 교역을 위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동서독은 이미 1949 10 8일에 프랑크푸르트 협약을 통해 그 다음 해에 동서독 간에 교역이 허용되는 물품의 리스트를 작성하였다그리고 1950 9 20일에 새로이 체결된 베를린 협약을 통해서 교역을 위한 양국 간의 기본틀을 정하고 추후에는 물품목록만 협의하기로 하였고, 1960 8월에는 변경사항이 있을 경우에만 논의하기로 협약을 개정하였다일반적으로 베를린 협정으로 불리는 이 조약은 1950년대의 할슈타인 원칙에 의한 서독의 동독 고립정책 그리고 1961년의 베를린 장벽 건설과 같은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1990년 통일될 때까지 유지되었다동서독 간의 교역을 유지한 원인이 단순히 경제적 실용주의 때문 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역을 위한 법적인 틀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출판교류와 같은 문화적인 교류 또한 지속될 수 있었고그 결과 동서 독일인들의 문화적 공동체 의식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헬무트 콜은 그런 문화공동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독일인들에게서 민족통일의 의식 (Bewusstsein der Einheit der Nation)이 깨어 있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독일에서는 분단시기 동안에 동독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서독의 텔레비젼을 시청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동독 당국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서독에 대해 적대감보다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경험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물론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독이 정치적 선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전파를 동독지역에 보냈기 때문이 아니었다그것은 서독의 방송국들이 동독 영토 한 가운데 섬처럼 자리한 서베를린의 주민을 위해 방송파를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었다그러나 서독 방송 전파를 서베를린에 전송하기 위해 서독은 동독에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불하였다그것은 정치적인 긴장이 발생하는 것과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볼 때 서독의 대동독 공공외교‘와 일상적인 외교정책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동서독 간의 문화 경제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 상호신뢰관계를 만들어 주었다그것이 궁극적으로 독일 통일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결어

위에서 우리는 공공외교 이론의 틀에서 행위자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비교적 보장되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외교를 바탕으로 하는 독일의 공공외교 전략과 분단 시기의 서독의 대동독 정책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정치와 문화 경제관계의 분리에 관해 살펴 보았다이러한 정책을 통해 독일은 외교 대상국 국민이 독일/서독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호감을 갖고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고도로 발전된 공공외교전략을 구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이 두 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는지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었다그러나 이 두 정책이 분명한 공통점을 보이고 그것이 하나는 통일에 기여하였고 다른 하나는 국제사회에서 독일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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