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방법’ 제공 못하는 해석학·현상학에 주목하는 이유
[인문학 연구 방법론의 경계 넘기] 사회과학의 질적 연구 방법론
최근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에서 ‘질적 연구 방법론’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거시적 구조와 설명에 집중해온 사회과학이 행위에 대한 미시적 이해를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을 하게 되면서, 경험의 구체성과 의미에 집중하는 질적 연구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질적 연구’는 통계적 수량화와 그 분석에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양적 연구’에 대비되는 인문학적 연구 방법론을 말한다. 사회과학의 제 분야에서 사용되는 질적 연구 방법론은 현상학적 연구, 체험연구, 근거이론 방법론, 문화기술지, 이야기 분석 방법론, 참여 행위 연구, 일상생활 방법론, 생애사 분석 방법론 등 다양하다. 방법론적 원칙이나 분석 절차에서의 강조점은 각기 다르지만, ‘질적 연구’란 개념은 구체적인 개인의 경험과 그 체험 이야기를 근거로 세계와 경험현실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방법론을 통칭한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현상학과 해석학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법칙’과 ‘구조’의 한계
법칙은 사회변화의 양상을 말끔히 설명하지 못하고, 구조는 수많은 행위와 선택의 의미를 섬세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철학적·인문학적 문제의식을 도입해 사회과학의 관점을 바꾸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요청일 수 있다. 철학과 인문학의 추상적 메타 이론은 살아있는 체험과 조우하면서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고, 사회과학적 탐구는 실증주의적 설명이 포착하지 못하는 인간 행위의 고유한 의미를 이해할 때 풍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에서의 인문학 도입은 실증주의 비판과 연결된다. 실증주의가 지향하는바 객관성과 실재가 무엇인지 되물으면서 현상학과 해석학은 실증에 근거한다는 과학적 설명과 예측이 특정한 ‘이론적 구축물’이란 사실을 지적한다. 인문·사회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도 주관적 연구 관점과 이미 주어진 개념 체계 및 이론사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불편부당하고 투명한 객관성은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에서 출발한 질적 연구는 사회과학적 탐구가 불가피하게 처할 수밖에 없는 편향성의 덫을 인정하고, 그 인정의 토대 위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촉구한다. 연구자의 가설, 상식적 선입견, 추측과 가정, 자연적 태도에 근거한 전반성적 믿음을 괄호치는 ‘판단중지(epoch)’는 질적 연구의 첫 원칙이다. 이는 또한 연구자와 연구 대상자 사이에 개입하는 권력 관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연구자는 타인의 경험을 가설적 이론을 채우기 위해 대상화할 수 있다. 연구자의 권력과 욕심은 그 경험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 층위를 모른척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따라서 질적 연구에서 철학의 역할은 연구 과정 전반을 관통하는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연구 대상에 대한 민감성을 지속하기 위한 성찰이자, 연구자 자신의 예단과 연구 과정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질적 연구 방법은 사회학뿐 아니라, 행정학, 경영학, 미디어 연구 등과 같은 실천 사회과학에도 도입되고 있다. 특히 사회복지학, 교육학, 간호학 영역에서 보이는 질적 연구의 적극적 수용은 연구 대상에 대한 배려란 윤리적 태도를 포함한다. 취약한 위치에 있는 대상자를 경험 주체로, 행위자로 받아들이고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노력, 과학적 관찰이 아닌 상호 관계에 근거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질적 연구가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과학제일주의’라는 망령에 맞서
인문학적 관점을 사회과학에 적용하고자 하는 질적 연구 방법론은 그러나 사회과학 영역에서 그 객관성과 일반성에 대해 비판 받고 있다. 질적 연구가 구체성과 차이의 관점에서 경험을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석 대상으로 삼는 데 대해, 그 주관적 경험이, 그 개인적 체험 이야기가 어떻게 일반화될 수 있는지 묻는다. 더욱이 해석은 아무리 자기 반성적 거리 두기와 무전제적 판단 중지로부터 출발한다 해도 자의성과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공격도 피할 수 없다.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연구,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자의적 해석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질적 연구는 방법론적 절차와 장치를 정교화 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해 왔다. 질적 연구는 우연적 대상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아니라 섬세하고 과학적인 장치를 통해 객관화된 탐구라는 것이다.
질적 연구의 정형화된 연구 도식과 정교한 해석 절차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론에 근거한 연구 결과가 현상학·해석학적 본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구 지침은 연구 수행과 괴리되고 연구 절차는 철학적 성찰과 분리되면서, 양적 연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연구 결과가 양산되기도 한다.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는 사회과학에 철학적·인문학적 문제의식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회의하게 한다. 그러나 질적 연구 방법론이 봉착하는 이러한 한계점들은 이들이 여전히 과학제일주의라는 망령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질적 연구의 분석 방법에 도입된 ‘과학적, 객관적’ 장치들로 인해 오히려 방법론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적 절차 너머에 있는 해석 방향이다. 체험 이야기 뿐 아니라 양적 통계자료도 질적 연구의 대상이 돼야 하고, 연구자, 연구 대상자, 관계, 언어, 권력 뿐 아니라 연구 방법의 절차도 철학적으로 해석돼야 한다.
현상학과 해석학은 질적 연구에 토대와 지침을 제공하고 연구 윤리와 반성을 촉구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해석학과 현상학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지평을 옮긴다. 그것은 과학제일주의적 규범에서 벗어나, 이해와 설명은 하나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 이 글은 『경계 짓기와 젠더 의식의 형성』(이화인문과학원 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0)에 실린 「인문학 연구 방법론의 경계 넘기: 현상학과 해석학의 방법론적 적용」의 핵심 주제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김애령 이화여대·HK연구교수
필자는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서양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이방인과 환대의 윤리」, 「데리다의 여성 은유」, 『예술: 세계 이해를 향한 도전』 등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