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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3967
Date
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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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국제통상협력연구소
기조세션2_독일_미하엘 가이어(Michael Geier)


한독수교 130주년 
그 과거와 미래

미하엘 가이어(Michael Geier) 전 주한독일대사 (2003-2006), 독한협회장 (2012~)

외교관으로서 먼 과거를 돌아볼 시간과 여유는 많지 않으나 한국과 독일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제가 임기 중에 한국이 통일된다고 확신하여 샴페인 한 박스 내기에서 진 적이 있으니까요

한독 관계가 처음 꽃피기 시작하던 130년 전에는 서울과 제물포(오늘의 인천)에 자리잡은 독일인은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기자이자 여행작가로 활동한 지리학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901년 여행보고서에 17명의 독일인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그 중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한국을 위한 청사진을 그렸던 언어천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3년간 고종황제의 중요한 컨설턴트로 활동하였지만 일제의 압력으로 1885년 나라를 떠나야 했고 20년간 한국에서 학교를 운영한 요하네스 볼얀(Johannes Bolljahn) 선생 역시 일제에 의해 폐교 당하였습니다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역시 한국에서 15년 동안 활동하다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1901년 한국에 도착한 리하르드 분슈(Richard Wunsch) 박사는 4년간의 의료활동 후 일제의 압력으로 도쿄의 영국 공사관을 통하여 칭다오로 넘어가 그 곳에서 장티푸스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감염되어 돌아가셨습니다그는 부인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1880서울과 한국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그리고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아니었더라면 독일인과 다른 서양인들이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지가 궁금해집니다.  

1880년의 한국에 대하여한국문헌을 읽지 못하여 서양문헌을 참고할 수 밖에 없지만그에 따르면 한국은 가난한 농업국가로 일본과 같은 계급사회였다고 합니다봉건사회적 특성으로 심각한 기근도 겪은 상태였습니다살기 힘들어 만주나 시베리아로 이주한 사람이 많아 1883년 당시 인구는 천만에 불과하였습니다(독일제국의 당시 인구는 43백만). 한국인들은 이주지로 멕시코와 하와이를 선택하기도 했습니다당시 서울의 모습은 지그프리트 겐테의 살아 있는 글과 슈멜터(Schmelter) 박사가 한독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괴테문화원에서 개최한 스위스 사진전을 통하여 조합할 수 있었습니다러일 전쟁 직후 주일독일대사관 부속 육군 무관이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현재 서울민속박물관에 전시)에서는 일본이 감행한 민간인 학살의 처참한 모습들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미국 외교관이 남긴 기록에는 주한미대사관 정원에 호랑이가 나타나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겐테는 서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촘촘히 자리잡은 낮은 한옥에 거리는 넓고 전신전화전차전기조명이 있어 비교적 현대적인 도시라고수 백 년에 걸쳐 벌채된 서울 주변 산들은 벗겨진 모습이었지만당시 독일 대도시 주변도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1883년부터 시작된 마이어 상점(Meyer und Co.) 직원들고종의 황실연회 책임자이자 최초의 서양식 호텔의 주인인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ntag)과 크린(Krien) 총영사를 포함한 독일인들의 생활수준은 좋았다고 전해집니다에커트 지휘자가 직접 키운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열기도 하고대대로 상인 가문이었던 볼터(Wolter)의 집에서 함께 새해를 맞기도 하고분슈 박사와 뤼르스(Lührs)의 집에서 카드게임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그 외 소풍을 다닌 모습이나 에커트씨의 딸과 벨기에 외교관의 결혼식 장면 등이 모두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의문은 가정이라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아니었더라면 독일인과 다른 서양인들이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지폰 묄렌도르프는 수공업산업교육광업과 신식 인프라에 걸친 전반적인 현대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일기장은 발견되지 못하였습니다서울역 벽화 중에 서울과 유럽을 연결하는 철로가 그려진 벽화가 있습니다분슈 박사가 부모님께 보낸 서신에 보면서울에 현대식 하수처리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고종황제가 영화프로젝터를 구입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고 하고한의사의 반발로 현대식 병원을 위한 계획 또한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1898년 구한말 관립 덕어학교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유사한 기관의 졸업생들은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그 기관들은 추후에 대학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외무부 외교 아카이브에 기록된 전문 중 당시 요코하마나 북경에서그리고 나중에는 서울에서 온 전보를 통해서는 당시 서울의 모습이나 일제가 아니었다면 한국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에 대한 해답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1898년 함대로 한국을 방문한 하인리히(Heinrich) 프로이센 왕자가 금강산에 있는 독일 금광을 방문하였다고 전해지고겐테 기자 역시 이 곳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당시 외무부는 일본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한국에 대한 정치적 사안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독일이 갖는 경제적 수익도 매우 적었습니다한국의 독일 수입량은 0.12%에 불과하였습니다그리고 독일 정부가 일제의 군사점령과 한일합병에 저항했던 기록은 실망스럽게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주한 대사관을 닫고 한국관련 업무는 요코하마에서 처리하였습니다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사실조차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이들은 1909년 일제시대 때부터 한국에 와 수도원과 신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배버(Weber) 원장과 앙드레 에카르트(André Eckardt) 교수가 침략당한 먼 나라의 소식을 독일에 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인 중 특히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이들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이미륵과 손기정입니다이미륵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한독협회와 독한협회가 17년째 수여한 상의 이름이 이미륵 상입니다(코쉭 명예회장이 5 17일 베를린에서 이은정 교수에게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1936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받은 손기정 선수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45년 포츠담에서 한국의 분단이 결정되었을 때독일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한국전쟁이 1950년 발발하자 많은 이들이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미 초토화된 독일과 상처 입은 베를린에도 전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았습니다그런 상황 속에서도 독일은 부산의 적십자병원에 인적물적 도움을 아끼지 않아 오늘날에도 구 적십자병원 정원에 당시 부산 난민을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2013년은 파독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사실 1963년이라는 해는 매우 임의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독일 내 한국 간호사는 그 이전부터 있었으며 국제법의 보호를 받은 이들의 입국은 1963/64에서 1971년까지 또는 1977에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당시 비판여론이 거셌습니다한국인 대부분이 필요 이상의 자격을 갖춘 인력이었으며 광부들은 지하 작업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개발원조라는 에티켓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짧은 교육을 마친 간호사들은 밤근무하며 요강이나 비우고 광부들은 힘든 지하작업을 해야 했습니다독일 노동부는 고용주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해야 했습니다언어의 장벽은 높았고(한국에 있는 독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독일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물론 당시 멘자음식을 생각하면 독일인들도 독일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하지만 나쁜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광부들을 위한 교육제도가 마련되었고 8천명 이상의 광부와 만 명 이상의 간호사 중 8천명이 오늘날까지 독일에 남아 2세 및 3세의 부모이자 조부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독한협회는 몇 달 전에 회원들에게 독일에서 임종을 맞은 후 한국으로 운구되는 것에 대한 보험을 제안한 바 있으나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회원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1961년과 82년 사이 시작된 독일의 개발원조와 독일 정치재단과의 교류한국 내 독일 투자로 시작한 한독 관계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여 이유재 교수가 말한 비대칭적 관계가 지금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미륵윤이상과 같은 선구자가 독일 땅에 묻혔듯독일인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한국 왜관 수도원에 묻혔습니다힐베르트(Hilbert) 드레스덴 시장과 홀렌더스(Hollenders) 명예영사가 드레스덴에서 조직한 네트워킹 역시 매우 뜻 깊었습니다대부분 학자로 이루어진 참석자들 모두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한독 관계의 현재는 눈 부십니다. BASF, BMW, 삼성과 기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양국간 무역량독일의 대한투자와 한국의 대독투자는 매년 증가합니다

정치적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위험합니다특히 한국에 있는 외국 외교관들에겐 더더욱 그러합니다통일이라는 주제가 제외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독포럼의 양측 공동의장이 다루기로 결정한 미래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G20 UN 내 독일과 한국의 협력.

-          경제시스템의 미래사회적 시장경제와 공동결정은 수출모델인가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스타트업 기업과 중소기업 진흥책은 무엇인가?

-          행정글로벌 경제 및 금융권력 시대에 독일과 한국 의회제도의 미래.

-          마지막으로한국과 독일의 청소년을 한독 논의에 참여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청소년의 참여도는 갈수록 낮아지고 독일과 한국 내 한독 모임은 갈수록 평균연령이 높아지고 있습니다청소년포럼이 몇 가지 안을 제시할 것입니다교환프로그램 Building Bridges가 올 해 4차년도를 맞은 것은 매우 희망적인 소식입니다코쉭 재무차관이 늘 강조하였듯이 청소년과 젊은 층을 편입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독 관계는 정치경제문화와 인적 교류에 걸쳐 매우 좋습니다한국 문화영화음악과 음식은 특히 독일 젊은 층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독일에서는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과 북한 정보를 영문으로 매일 접할 수 있습니다. 40개가 넘는 키워드를 적어놓았습니다만젊은 층은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하지만 우정의 꽃은 물거름과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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